2월의 어느날, 그러니까 예비소집 같은것이나 보다, 면사무소로 불려갔다.
누군가가 열까지 셀수 있냐고 물었다.
그래서 또박 또박 하나,둘,셋...열 까지 세는 시범을 자신있게 보여 주었다.
(훗날 이 비슷한 질문을 또 받은 적이 있다. 손가락 열개를 모두 움직일수 있느냐고, 그래서 하나,둘,셋..열 까지 세면서 보여 주었다. 징병검사장 그리고 면허시험장)
그 다음엔 내 이름을 쓸 수 있냐고 물었다.
역시 확고하게 답했다.
"어데요".
이것이 패착이었다. 이름을 쓸 수 없어서 나는 학교에 가게 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3월의 어느날, 여느날과 다름없이 염소끌고, 염소따라, 뒷산에 있다가 학교가는 날이라고 불려갔다.
야산 한귀퉁이 덩그라니 놓인 콘크리트 더미가, 곳곳에 철근이 쑹쑹 나와있는, 학교였다 (그나 이후 몇년사이에 눈부신 발전을 한다)
황토밭 진창에는 미군 불도저가 왔다 갔다 하며 시골아이들에게, 어른들에게도, 경이스런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경악스럽게도 3월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근사한 운동장을 만들어 주고 갔다)
 
할머니는 이름 쓰는거 꼭 배워오라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모아온 신문지를 잘 꿰어서 두툼한 연습장을 만들어 크레용 쪼가리 몇개랑 같이 손자에게 들려 보냈다.
기대에 적극 부응하여 한주도 안되어 할머니 이름까지 쓸 수 있게 되었으나 학교는 계속 가야만 했다.

오후반 차례가 돌아오면 꼭 국기하강식이란걸 보게 된다.
5시면 근사한 연주가(물론 테이프이지만) 나오고 더 근사한 폼으로 군인들이 경례자세로 한참을 서 있다.
집에 가던 동네꼬마들도 왠지 그래야 할것 같은 분위기에 눌려 끝 날때까지 같이 서서 경례 한다.
황당스럽게도 꾀 오랫동안 그 깃발과 그 장엄한 곡이 당연스럽게도 태극기와 애국가의 또 다른 버젼이라는 생각을 의심치 않았다.

한주에 한번정도, 두번인 끝내주는 주도 있었다, 미군 쓰리쿼터가 학교엘 온다.
순도 100% 옥수수만으로 구어진 빵을 이후 나는 한번도 먹어 본적이 없다.
노오란, 더 진한 노랑도 있고 약간 타서 거므스름한 노랑도 있고, 향긋하고 갓 구어내서 따뜻한 빵 한더미(애들 몸집에서 보자면)씩을 앞에 받은 아이들의 황홀경을 상상이나 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때부터 일꺼다, 노랑색에 대한 과다타액 분비 현상이, 심지어 방콕의 그 거대한 바퀴의 뒤집어진 뱃살을 보고서도 침을 흘릴정도로 말이다)
아이들은 빵부스러기에 침을 발라 정성스럽게 자기 꺼에다 붙인다. 그자리에서는 누구도 먹질 않는다. 고이고이 어딘가에 싸넣고 집으로 집으로 정신없이들 간다.
(모두들 그 황홀경을 나누어 가질 동생이나 누군가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 덩치들은 언제나 넉넉한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구나 사람좋아 보이며 누구에게도 삶의 고통이 잔뜩 패인 매마르고 거친 동네 사람들의 인상을 볼 수 가 없다.
아이들에게 친절하며 무언가 하나 쥐어 줄려고 안달을 하고 있다.
(채 뜯지 않은 거대한 레이션 깡통 한개가 그 절정이었다.)

매우 영악스럽게, 또는 매우 저렴하게  골수 친미주의자를 하나 만들어 냈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 아이들에 대한 생각은 서러움과 유사한 감정으로 끝나게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나 보다.
한계상황에 몰린 다른 나라 아이들을 보자면 늘상 드는 생각이지만 얼마 안되는 비용으로서 훗날 극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위가  아닐까.
(설령 묻지마 퍼주기식이라도, MB말씀처럼 재벌들에게 몰아 주다 보면 넘쳐서 전국민이 혜택을 보게 된다는데, 그 쪽 아이들에게도 무언가 돌아가지는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