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참가한 시위는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80년 5월의 서울역 광장이다.
내가 거기서 어떠한 역을 하였는지는 전혀 언급할 거리가 아니다.
내가 거기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가 절대 중요한 것이다.

열살차가 나는 사촌은 날 데리고 나갔다.
사촌이 들려준 널판지 피켓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사람들 무리속을 부지런히 사촌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사촌은 낡은 허름한 빌딩사이 골목을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더니 나즈막한 옥상에 날 올려 놓고는 데릴러 올때까지
거기 가만 있으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장관이었다.
보이는 끝까지, 어딜 보아도, 시청쪽이나 용산쪽이나, 사람들로 매워져 있었다. (10만이라고 하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단 한가지 이유로 거기 나와 있다는 사실에 극도로 흥분되어 온몸에 소름이 돋은 상태에서
얼마나 오래동안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는지 모른다.

사촌은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혼자 집으로 왔다.
(그날 본 광경으로 인해 머리가 꽉 차 버려 사촌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냥 와 버린거다)
사촌이 내 걱정으로 인해  집에까지 쫒아 오지만 않았다면 아무도 모른체 넘어 갔을 일이었지만 
모두 다 알게 되었고 아버지는 매우 화가 나신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사촌은 장시간 논쟁을 벌였고 그 대화의 대부분을 놓쳐 버리긴 했지만 이미 세상 떠난 분들이라 내가 유일한
증인일 것이다.   
당연히 세부를 그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략 다음의 취지로 머리에 남아있다.

1.  어린아이를 왜 시위현장에 데리고 갔느냐 에 대한 사촌의 답변

  아주 교육적인 행동으로서 자기는 동생이 충분히 이해 할만한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정치적 발언이다)
  밥이 쌀나무에서 나온다고 할까 봐  애들을 농촌에 견학시키는 판인데 밥만큼 중요한 자유 민주주의란게
  어디서 어떻게 하여 나오는 지를 당연히 보여 주어야만 한다.
  (이 말은 최소한 나에게는 절대 맞는 말이다. 난 아주 짧은 시간에 너무나 똑똑히 배웠다)

2.  군사독재는 끝났는데 아직도 권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투쟁밖에 없느냐 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

 자유는 권력의 분점이다. 자유는 권력과 동질이며 한 이면일 뿐이다.
 권력자가 권력의 독점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그것이 권력자의 자질이기도 하다.
 그러니 권력자가 알아서 자유를 나누어 주기를 기대한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그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했던 바와 같이 (실패한 구데타의 괴수는 사형이다)
 그들에게서 권력을 도로 뺏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만한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시위에 가담하지 않는 학생과 일반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

 오직 투쟁으로서만 이 나라는 정치적인 발전을 이룰 수가 있다.
 정치를 부정하고 자신과 무관한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가 공기를
 마시며 사는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와 같다.
 정치라는건 사람들간의 이해관계의 조절이며 두사람이 모이면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내 평소 지론의 출처가 여기다)
 이 사실을 깨친 사람이 이 나라의 발전을 원하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투쟁에 나선자들이 흘린 피와 그들의 희생으로 받은 댓가는 이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지금의 권력자들에게 까지
 공평히 돌아가고 모두들 만끽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심은 나무에서 만들어진 깨끗한 공기를 숨쉬면서도 방관자들은 그 공기의 출처를 이해하지 못할것이며
 그들의 양심과 지성도 그들의 무지함을 깨지는 못할것이니 그들을 탓하지 말며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
 
 나는 인민이 각자 그들의 국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30년이 되도록 나는 아직 저 발언의 정확한 의도를 모른다.
 그렇지만 젊은 날 10년간 해외를 떠돈데에 무의식적 배경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까지는 어떻게 할 수 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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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1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viana 2008-06-2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80년이라니..도대체 그때가 몇살이셨던 거에요.
암것도 모르던 전 대통령이 죽었다고 슬퍼했던 때잖아요...와...

땡땡 2008-06-2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엘리트 훼미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