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래감독이 의도하였던 혹은 그렇지 않던 디워는 몇가지 심각한 철학적논의를 야기 시킨다.
이건 베스푸치가 아메리카를 의도적으로 발견하였던 그렇지 않던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다.

대략 나열해 보면...

첫째. 인간은 신의 도구인가?
둘째. 그렇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운명에 따르게 되어 있는가?
세째. 정체성은 심각한 육체적 손실(즉 윤회)을 거칠지라도 유지되는가?
네째. 선이 자신의 파괴(죽음)를 원하더라도 여전히 선인가?
다섯째. 그렇다면 죽음은 그 형식에 따라서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가?


나는 그다지 영화를 보지는 않지만,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내게 생각 할 거리를 주는가 이다.
그리고 싫어하는 영화는 어떤 생각이던 결론에다 꿰 맞추어 내게 강요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때 디워는 매우 훌륭한 영화이다.
그리고 화려한 외출은 매우 나쁜 영화이다.
내게 객관적 관점을 권유할 생각일랑 하지 마시라.
객관적 관점이란 애시 당초 존재 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 원하는 관점이 있을 뿐이다.

심형래의 미덕은 디워 역시 여전히 먼가를 강요하고 있지만 그 표현의 조잡함으로 인해 내가 그걸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 더해서 심형래는 중요하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혼동 내지는 무시해 버리는 두가지 철학적 개념을 제시 해준다.

결정론과 예정론이다.
이 개념은 자유의지 문제와 곧 바로 연결되지만 이건 메가톤급 주제이니 그냥 넘어가자.
결정론과 예정론은 결국 끝에서는 매 한가지 결과로서 구분한다는 것이 실용적으로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쨌거나 죽을 것이다" 식으로 방기하지는 말자.

두 뇨자, 한뇨 이름은 듣자마자 까 먹었다. 세라는 기억한다. 하여간 터미네이터는 기억할만 하지 않은가?
조선뇨자와 미국뇨자.

결정론으로서는 미국뇨자는 자신의 장래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그저 버둥버둥 대다 스물이 되면 이무기에 잡아 먹히면 된다.
현재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현재의 연장선으로서 역시 고정불변이다.
당연히 현재가 이미 정해진것은 과거가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정론으로서 조선뇨자 역시 자신의 장래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그러나 선이던 악이던 어떤 이무기에도 먹힐것을 거부하며 자폭한다.
다음 생에서 결국은 잡혀 먹히지만 당장은 절벽 다이빙을 선택한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만 그게 과거와 현재의 필연으로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어려운가?
그렇다고 심형래를 탓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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