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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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을 공유하는 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세계를 다른 언어로 번역해내는 일이라고 한다. 임현주의 <한영 육아 번역기>는 한국과 영국처럼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두 사람이 부모라는 공통의 배역을 맡으며 생기는 일을 담아내었다. 연애, 결혼 그리고 육아처럼 큰 굴곡속에서도 서로 다른 삶을 '번역'해 나가는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오역들마저 사랑의 일부였음을 고백한다. 완벽한 이해라는 불가능한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고, 또 용기를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처음엔 육아에 국한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책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물론 부부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육아이지만 그 부피가 너무 크지는 않아야 한다는 균형감각이 드러났다. 육아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나’라는 섬이 통째로 잠기지 않도록 부부만의 공간을 사수하고 육아와 무관한 대화를 나누며 ‘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한다. 아이가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가꾸어 나가는 독립적인 어른의 뒷모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가 정해둔 ‘좋은 부모’라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향에 매몰되기보다, 적어도 아이에게 ‘나쁜 어른’의 본보기가 되지 않겠다는 정직한 다짐이 드러난다.(102P)

이 책에서 드러나는 지점은 한국 사회의 절대적 기준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고 튀지 않는' 무난함을 지향하며, 그 기준에서 벗어날 때 불안을 느낀다. 스스로에게도 버겁다고 느끼는 그 엄격한 잣대를 타인에게도 똑같이 들이대며, 서로에게 일말의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 삭막함 속에서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무난함'이라는 압박과 그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법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드러난다. 한국 사회의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나 타인의 삶에 쉽게 틈입하는 오지랖 섞인 시선들 속에서 평가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육아를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물론 TV 속 육아는 상당히 달콤하고 현실의 육아는 거친 핸드헬드로 찍어낸 리얼리즘 다큐멘터리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불완전한 화면 속에는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따뜻함과 사랑의 가치가 담겨 있다. 마냥 두렵고 어려울 것 같았던 육아를 그리고 아이들을,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인상깊다. 이처럼 육아는 아이를 개조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부모 자신의 미성숙함과 불안을 마주하고 이를 정성껏 '번역'해내는 일이라고 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은 영화처럼 화려한 미장센을 갖추고 오지 않으며, 때로는 어설프고 웃기기까지 한 현실의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124P). 그 불완전함을 긍정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저자는 그 인내의 시간 속에서 부모와 아이가 각자의 세계를 지키며 나란히 자라날 수 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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