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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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고 기술이 세상을 유례없는 속도로 바꿔놓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에서 '가장 인간다운 본질'은 무엇일까. 기술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이상하게도 남성성에 대한 탐구는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정지' 상태다. 가부장제의 낡은 권위가 허물어진 자리에 마땅히 들어서야 할 새로운 남성성의 부재는 우리 사회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책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바로 이 공백을 인식하여 그리스 신화라는 인류의 거울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건강한 남성성의 원형을 '재건'하고자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성과 비례하게 남성성 또한 전형적인 고정관념에 갇혀있다. 모두가 변화를 맞이하는 와중에 정해진 모델을 제시하지 않고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라고 꾸짖기만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소위 '나쁜 남자'에 대한 정보는 사방에 넘치지만 '좋은 어른' 혹은 '건강한 남성'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좋은 아들, 좋은 남편과 같은 역할로서의 전통적인 남성성을 요구한다.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은 요구가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남성성의 공백은 이 시대의 아들들을 무력감과 분노, 혹은 정체성 상실이라는 모호함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때 책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고민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서사인 그리스 신화에 비추어 본다. 현대사회에서 제시하는 교과서가 아닌 고대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통해 남성성의 원형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로마신화의 상징적 왕이자 아버지인 제우스다. 그는 할아버지 우라노스의 '억압'과 아버지 크로노스의 '파괴'를 끊어냈다. 제우스의 위대함은 자신의 강력함뿐 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신에게 역할을 분배하고 그들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조율의 미학'에서 나온다. 내면의 모순과 대극을 외면하지 않고 그 갈등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세운 질서,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남성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우스의 질서가 무작정 '선함'에 치우쳐져 있지는 않다. 저자는 건강한 남성성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 '그림자의 수용'을 꼽는다. 우리는 흔히 이상적인 아버지를 결점 없는 성자로 상상하지만 신화 속 아버지는 때로 파괴적이고 잔혹한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내 안의 원시적이고 공격적인 에너지를 부정하고 무의식의 심연으로 밀어넣을 때, 그것은 오히려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파괴적인 본능을 가진 나 또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마땅히 추구해야 할 남성성은 결점 없는 영웅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고 그 결함마저 자신의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불완전함이야말로 신의 특징이라는 말처럼, 인간인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남성성을 단 하나의 정답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제우스가 다스리는 올림포스에는 저마다의 결핍과 강점을 지닌 다양한 아들들이 존재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창조적 예술로 승화시킨 헤파이토스, 억압된 공격성을 생명력 있는 열정으로 전환하는 아레스, 명료한 이성으로 세계를 정돈하는 아폴론, 그리고 논리를 넘어 영혼의 황홀경을 노래하는 디오니소스까지. 더해 관계의 신비와 사랑의 에너지를 품은 에로스, 경계를 허물며 위트 있게 소통하는 헤르메스, 그리고 가장 깊은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 가라앉는 하데스까지 더해지면 남성성으로 향하는 영혼의 지도는 비로소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남신들은 현대 남성이 가질 수 있는 수만 가지의 얼굴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제우스가 될 필요도, 아폴론이 될 필요도 없다. 때로는 하데스처럼 자신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 영혼을 돌보아야 하고, 때로는 헤르메스처럼 경쾌한 위트로 세상과 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꿈틀대는 이 다양한 신성들 중 어떤 에너지가 지금 나의 영혼을 깨우고 있을지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결핍과 마주하는 용기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갈 아들들이 가져야 할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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