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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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조금씩 어중간하다. 완벽한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의 부정의에 완전히 눈을 감은 악당도 아니다. 조형근 작가는 스스로를 '소시민으로서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지길 기대하며 보낸 그 어중간한 날들의 기록을 <앎과 삶 사이에서>에 담아냈다. 그는 소시민들이 만드는 힘을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무조건적인 지지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힘센 소수의 잘못을 엄하게 꾸짖되 보통 사람들이 지녀야 할 책임 또한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작은 개인들의 행위가 모여 세상을 뒤집을 '힘'이 커지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괴물'이 부패한 권력자나 탐욕스러운 자본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초입(6p), 저자는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구조적 부정의'라는 개념을 빌려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우리가 악의를 품지 않아도 단지 각자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며 제도와 상호작용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불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성찰이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합법적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소비자는 그 덕에 빠르고 저렴한 서비스를 누린다. 누구도 법을 어기지 않았고 악의를 품지도 않았지만 그 결과로 위험과 빈곤은 특정 집단에게 집중된다. 기후 위기, 지역 소멸, 부동산 폭등 역시 마찬가지다.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고, 내 집값이 오르길 바라는 평범한 욕망들이 모여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조용한 불의’를 빚어낸다. 의도가 없었더라도 결과에 연루되었다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을 공유하고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앎과 삶의 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벌어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저출생 담론을 다루면서도 '노동력 공급'이나 '복지 비용'이라는 차가운 경제 논리를 거부한다.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한 유인책을 내놓을 게 아니라, 아이를 낳을 만한 세상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152p에서 지적하듯, 각자도생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연대는 붕괴했고 민주주의는 허약해졌다. 선거철만 되면 요란해지지만 정작 알맹이는 빠진 정치의 수사들. 저자는 묻는다. 피의 대가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은 어떤 곳인가? 그 세상은 어떤 정의를 약속하는가? (164p)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정치는 그저 '지저분한 전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에 대한 비유(201p)는 특히 날카롭다. 물을 끓이려면 불을 지펴야지 물만 더 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횡포에 노출된 나라에서 최저임금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러나 정치는 어떤 집단이든 잠시 '액세서리'로 쓰고 버릴 뿐 그들을 존엄한 주체로 대우하지 않는다.


가장 민감하지만 통찰력 있는 비판의 지점은 '86세대'에 대한 비판이다. 241p에서 저자는 고백한다. 양심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이 집 밖에 가득한데, '불편한 말과 위험한 정치가 필요한 때에 집이 너무 편안하다'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세대는 이제 주류가 되었고 기득권이 되었다(254p). 또한, 한국 자본주의는 이미 고도로 구조화되어,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정의를 보장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공정경쟁'이라는 이름의 게임은 오히려 불공정한 결과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고 그 게임에 참여조차 못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때 희망의 사다리였던 대학은 고도화된 서열화와 등록금 고통의 현장으로 전락했다.


이 책은 위험하다.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기 딱 좋은 '모두까기 인형'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형근 작가가 지닌 용기는 바로 그 '민감함'에서 나온다. 사회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위선, 인정, 타협이라는 복잡한 무늬로 짜여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그동안 불편하지 않게 여겼던 생각들을 굳이 끄집어내어 불편하게 만든다. 중도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양극단의 확성기 소리만 가득한 한국 정치의 기형적인 단면을 냉철하게 해부한다. 정치적 무관심과 지나친 집착 사이에서 갈 길을 잃은 우리에게, 삶 자체가 곧 정치의 일부임을 일깨워준다. 차가운 냉소로 끝나지 않고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한 지식인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 책을 덮으며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어디서부터 기준을 잡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막막함이야말로 '앎'이 '삶'으로 전이되는 첫 번째 신호일 것이다. 모두를 위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려 했던 저자의 고투는, 결국 어중간한 우리 모두를 향한 따뜻하면서도 따끔한 연대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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