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랗게 텅 비어있던 호수에 잔잔한 달빛이 물든다.평소엔 잔잔하다가 급속도로 얼어버리는 마음은 물이 가득하지만 빛을 잔뜩 반사해버려 언 상태를 유지하는 호수와 같았던 호정의 마음. 성장하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그 나이에 머물러 있다. 그렇게 정체된 마음은 잠잠해지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채 수면 위로 빼곡하게 나타난다. 호정의 마음이 한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어버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린 과거 때문인지 어떠한 정답지도 내려지지 않은 지금 때문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게 했다. 곧은 마음도 타인에 의해 파먹혀질 때,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거짓에 물들어버리곤 한다. 때론 기대가 절망으로 가라앉아 무기력해지고 의미가 없는 기억에 의존하기도 했다.너무 많은 생각이 말의 모양과 형태를 뭉그러뜨려 하고싶은 말을 언제나 속으로 삭혀야 했던 호정. 따뜻한 온기를 가진 은기의 손은 호정의 마음에 한공간을 만들어냈다. 커다란 공간이니만큼 그 온기가 한순간에 사라져 그동안 비춰왔던 햇빛마저 거둬가버리는 듯했지만 결코 놓지 않아 지나간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한다. 그렇게 마음의 빈방이 생기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호정의 마음이 느껴졌다."기억은 블록처럼 시간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게 아니다. 여러색깔의 물감이 어지러히 뒤섞여 있는 것 같다. 모든 색을 집어삼킨 어둠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