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예수회 소속이며 평화 운동가인 존 디어 신부는 일흔 살의 반전운동가 필립 베리간 신부와 여성운동가 린 프리드릭슨 그리고 또다른 평화운동가 프리드릭 브루스와 함께 세이머 존 미공군기지의 철조망을 뚫고 훈련장에 들어선다.
당시 이라크 침공훈련중이던 F15 전폭기에 접근하여 망치로 내리쳤다. 이러한 실천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 는 말씀에 근거한 행동이었다.
원제는 Jesus the Rebel 이다.
'말썽꾼 예수', '반란자 예수' 이고 영어부제는 'Bears of God's Peace and Justice'(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짊어진 사람들..Bears가 다양한 뜻이 있는데 어떤걸 넣어도 될 듯 ..)이다.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말씀들 중 생애 순서대로 33개의 본문을 택하고 재해석한 책이다.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삶은 세례를 통한 하느님 경험과 광야기도에서 시작된다.
세례를 받은 후 예수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는 중에 예수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다.
하느님의 영이 마치 비둘기처럼 몸의 형태로 그에게 내려오고,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음성을 들었다.
이처럼 큰 위로의 말씀이 예수를 변화시켰다.
곧 하느님의 확언과 승인을 드러낸 그 말씀이 예수에게 용기를 부어줌으로써 자신의 삶을 하느님과의 매우 친밀한 관계 속에 하느님께 충성하도록 이끌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 안에서 불타오르도록 이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선언한 말씀이다.(23쪽)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모든 순간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아갔다.
그의 이런 자기이해는 마음을 모아 고요하고 친밀하게 기도를 드리는 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 한결같이 비폭력의 길을 고수하는 일, 하느님의 비폭력적인 사랑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일,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는 일과 연관되었다.
세례는 예수 이후 제자들에게도 결단의 순간이었고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다.
처음 3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을 보증하는 것이었으며, 이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한 것 때문에 살해당하곤 했다.
세례 자체가 제국의 권위에 대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이었다.
실제로,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곧바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처형되곤 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오늘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요구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추구하며, 병든 사람들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보고, 죽음의 우상을 타파하며,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소비주의를 배격하며, 공동체를 건설하며, 칼을 녹여 보습으로 바꾸며, 평화의 하느님을 예배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사회적 실천을 감당하기 위해 애쓴다면, 우리는 제자직의 날카로운 가시를 느끼게 될 것이며 복음이 생생하게 살아나게 될 것이다.
구조적 억압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 저항을 더욱 많은 그리스도인이 따를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불의한 세력과 공개적으로 대결할수록, 더욱 많은 우리들이 공격을 받고 위협을 당하고 체포되고 투옥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예수에게 그만큼 충성함으로써 성숙해 질 것이며,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은 한 사람씩 낫게 될 것이다.(109쪽)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예수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너희 모두를 죽음의 문화 속에 갇혀 있게 만드는 죽음의 돌을 치워라.
죽음의 문화 속에 가라앉도록 유혹하는 세력에서 벗어나도록 서로 도우며 비폭력의 자유속으로 들어가도록 서로를 해방시켜라.(206쪽)
죽음의 세계에 생명 그 자체를 드러내며 저항한 예수는 자신의 생명마저 온전히 내어놓고 십자가에서 절규하며 죽어간다.
예수의 절규는 불의와 전쟁과 제국의 모든 희생자들의 절규이다.
예수의 절규를 통해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이런 현실에 대해 눈을 뜨도록 애원하시며, 그 미친 폭력을 거절하고, 그 비인간성을 회개하라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애원하신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이 들려온다.
예수의 부활에 대해 알고 싶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싶다면, 제자들처럼 우리들 역시 갈릴래아로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우리 자신이 살아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차례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처럼 오늘날의 가난에 찌든 갈릴래아로 가서, 제국의 당국자들과 예루살렘의 제도화된 불의와 대결한 후, 비폭력의 길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갈 차례인 것이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되며 그 부활 이야기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며 구원자로 예배하게 된다.
절망만을 안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가운데 예수가 나타난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원하지만,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다.
우리는 절망의 문화에 세뇌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며, 비폭력은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은 우리가 몸 바칠 가치가 없다고 믿는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촉구하신다.
그분은 십자가의 지혜에 호소하며 우리가 그분을 따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도록 초대하신다.
우리가 희망의 새로운 소식을 듣고, 그 비전을 지닌 낯선 사람을 우리의 식탁에 환영하고 함께 식사를 나눌 때, 우리의 가슴은 흥분으로 타오르게 되며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다.
우리는 비폭력 저항의 공동체로 되돌아가 그의 평화운동을 이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