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남자는 없다 - 혐오사회에서 한국 남성성 질문하기 질문의 책 15
손희정 외 지음,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엮음 / 오월의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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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성’은 본질적/자연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의 형태이다. 권력이 사회적 관계와 구조 속에서 남성에게 부여한 존재/역할모델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이해해야 비로서 남성성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섹스=젠더는 각기 다른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섹스의 본질성/자연성을 해체하고 섹스 또한 젠더임을 주장한다. 
버틀러는 보편적 체제로서 이상화되어 정체성의 본질화에 영향을 미치는 억압의 기제들이, 실은 제도 담론에 의한 것이라 하며 그것의 본질성이 허구임을 폭로한다.

‘여성’혹은 '남성'이라는 범주는 권력 체계의 생산물이므로, 우리는 그것에 관해 어떤 불변적 정체성도 규정할 수 없다.
젠더는 철저하게 역사적 맥락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단일 기원도 그리고 그로부터 산출되는 어떤 단일한 억압적 상황도 있을 수 없다.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접점에서 형성되는 버틀러의 젠더는 많은 차이들을 내재하고 있는 '여성' 혹은 '남성'의 범주를 이해할수 있게 한다.

'그런 남자는 없다' 는 역사적 맥락속에서 한국의 남성성이 성립되고 만들어지는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접점들을 읽고 주체화된 남성성과 비체화된 여성성을 이야기 한다.

사실상 ‘여성 혐오’는 ‘남성성’을 구축하는 핵심 전제인 동시에 필연적인 구성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이라는 경계 바깥에 머무르며 그 경계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구성적 외부’로 기능한다. 
‘여성’을 매개하지 않은 채 ‘남성’은 젠더 정체성의 결여를 허구적으로나마 메워갈 방법이 없다. 
점점 심해지는 강박적 불안과 신경증을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여성 혐오’를 비롯해서 ‘여성’을 타자화하는 젠더화 전략은, 불안정하게나마 ‘남성’이라는 젠더 경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김영희 '남성'의 불안과 우울을 대리하는 '여성의 죄' 60쪽)

총4부 13편의 글들중 몇편은 다른 책에서 읽은 글이지만 잘 만들고 잘 쓴 책이다.

목차만 봐도 눈부신 책이다..^^

1부 대한민국 남자의 탄생
‘남성’의 불안과 우울을 대리하는 ‘여성의 죄’ : 구술 서사의 연행과 젠더 주체로서 ‘남성’의 형성
우익 청년단체와 백색테러의 남성성 : 2015년과 1945년의 접속
‘무기 없는 민족’의 여성이라는 거울 : 해방 전후 탈/식민 남성성과 여성 혐오

2부 근대국가와 ‘만들어진 남자’
‘남자다움’의 안과 밖 : 1950~1970년대 한국의 비규범적 성애· 성별 실천과 남성성의 위치
국가 남성성 훼손을 땜질하는 불/가능한 영웅 : 상이용사에서 패럴림픽 영웅까지
군인, 사나이, 그리고 여자들 : 젠더화된 군사주의의 문화적 재현
카키, 카무플라주, 하이브리드 남성성 : 포스트근대의 군사적 남성성

3부 IMF 이후 한국 남자의 초상
폐소공포증 시대의 남성성 : K-내셔널리즘, 파국, 그리고 여성 혐오
중년 남성의 육체라는 아카이브 : 2000년대 백윤식 캐릭터의 모호성과 포스트 IMF
브로맨스 vs ‘형제’ 로맨스 : 포스트 밀레니엄 남성은 친밀성을 꿈꾸는가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 :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한국 장편 남성서사의 문법과 정치적 임계

4부 디지털 시대의 남자 되기와 여성 혐오
웃음과 폭력 : 혐오 없는 웃음은 가능한가 
Digital Masculinity : 한국 남성청(소)년과 디지털여가

구술서사를 연구해온 김영희의 글이 인상적이다. 
아버지 살해를 기반으로하는 서구신화나 전설들과는 달리 한국의 서사는 '주몽과유리처럼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나 부모를 위해 자신 혹은 자식을 희생시키는 효행담이 주를 이룬다.
가부장문화의 연행과 전승을 통해 한국 사회 ‘남성’이 젠더 주체로서 사회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 혹은 자식을 희생시키는 이야기는 동시에 ‘아들(남성)을 죽이는 어머니(여자) 이야기’이며 한국 남성성에 잠재된 불안과 희생양 의식이 여성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여주고 오늘날 여성 혐오와도 궤를 같이한다.

'국가 남성성 훼손을 땜질하는 불/가능한 영웅: 상이용사에서 패럴림픽' 에서 저자는 ‘정상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헤게모니 남성성에서 비가시화되는 존재인 장애인 문제를 다룬다. 
남성 신체의 강인함과 정상성에 기반을 둔 근대 민족국가가 손상된 남성의 신체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펴본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손상된 남성성을 영웅시하는 방식으로 혹은 신체의 훼손으로 부서진 남성성을 어떻게 극복하고 복구 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남성성 중심의 사회를 더 강화해 나가는 '정상사회'의 모습을 비판한다.

'브로맨스 vs ‘형제’ 로맨스’란 글은 최근 유행하는 브로맨스, '형제담론'을 소재로 한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 사이에 ‘친구=형제’의 위계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친밀감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 무능함, 기존과는 다른 관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빈곤감은 동어반복을 맴돌다가 한때 소비되고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한편한편의 소논문들이 가지는 무게감이 남다르다.
모든 젠더에게 강요된 남성성의 사슬을 끓을 수 있는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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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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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폭력, 억압과 좌절, 불안과 공포는 임철우의 소설속에 시리도록 흐르는 강물이다.

전작 '백년여관'에서 작가가 ‘넌 늘 왜 그런 것만 쓰느냐, 
5월이나 6·25 이야기 말고 멋진 소설을 좀 써보라’며 타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임철우의 답변은 늘 확고하다. ,
‘삶의 굴레가 되어버린 고통스런 기억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그런 고통은 늘 현재형이고, 그 지옥의 시간에 결박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작가로서 내가 지닌 책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여전히 지금도 한국 현대사 속 그 고통의 현장에 머물러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보는 증인이고 작가이다,

임철우는 광주 오월에서 겪은 고통을 해방 이후의 역사적 기억 전체로 확장하면서 그 폭력과 고통을 반복적으로 현재화시킨다. 
아이, 여성, 노인 등 경계인/이방인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역사'에 포함되지 못한 주변부의 망각된 흉터를 드러낸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내재되고 축적되어가는 과거의 기억들, 삶의 흔적들을 부정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으로 경험적 현실로 받아들여야하죠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저에게는 단절된 두 세계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명의식이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서서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소설을 통해 만들어보고자합니다.(2004년 문학과 경계 대담 중에서)

임철우의 소설은 노인, 아이, 여인 등 주변부 존재들이 감지하는 정체불명의 것들과 그들의 ‘몸’에 나타난 병적 징후를 통해서 역사적 폭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들에게 유령/괴물들의 회귀가 계속되는 한, 현재는 고통이 지속되는 과거이며 도래할 미래 역시 역사적 고통이 반복되는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유령/괴물과 마주하고 그것을 새롭게 기억해야 비로서 잊을 수 있는 역설이 그의 소설속에 들어있다. 
역사적 기억이 왜곡되고 상처로만 남는 것에 저항하면서 온전한 진실과 기억됨을 통해 진정한 망각의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쓰기가 임철우의 소설이다.

앞으로 언제까지 소설을 쓰게 될지, 쓴다면 어떤 글이 될 것인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뭐라고 할까, 내가 세상의 시간의 흐름 안에서 함께 흘러가고 있다기보다는, 눈앞으로 지나가는 세상을, 그냥 혼자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그래도 뭔가를 쓰기는 할 겁니다.
분노가 아닌. 이런 슬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극적이거나 역동적이지는 않아도, 가만히 응시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2013년 실천문학과의 대담 중에서)

이 책에서도 임철우는 여전히 ‘기억의 작가’이고, 고통과 죽음, 그리고 후회를 말한다. 
이제 그는 역사적 아픔과 죄의식을 넘어 일상의 죄악과 악의 평범성을 사유하고 그 모든 아픔과 분노를 넘어 죽음으로 드러나는 슬픔과 서정의 정서가 깊게 담겨 있다.

표제작인 '연대기, 괴물' 은 육십대 노숙자의 지하철 투신 자살에서 시작한다. 
‘신원불명’으로 처리될 듯했던 이 사건은 그가 쥐고 있던 식칼의 지문 덕분에 1949년생, 송달규. 그의 “연대기”로 이어진다.
보도연맹 사건 서북청년단, 베트남 전쟁, 세월호 사건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대기 속 연속된 고통을 괴물의 환상으로 겪어내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긴 세월 무연고자로 살아오며 고엽제 후유증으로 물집에 뒤덮인 채 끝내 환각을 쫓아 지하철로 돌진해 생을 마감해버리는 그는 한 세대의 상징적 초상처럼 읽힌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그 많은 아이들이……. 순간, 그는 두 눈을 의심했다. 
거꾸로 처박힌 선체 주변의 수면 밑에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놈이었다. 공룡 닮은 몸통, 뱀처럼 긴 꼬리,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정체불명의 괴물. 
그놈은 흐릿한 수면 밑에서 검은 지느러미를 부챗살처럼 펼친 채 뒤집힌 선체 주위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연대기, 괴물'중에서 )

모든 소설에 죽음이 등장한다. 
죽음 이후에 남겨질 내 몸뚱이의 모습에 고민하기도 하고 유년기에 우물을 들여다보던 소년이 냄비에 코를 박고 죽는 고독사의 노인으로도 사라진다.

임철우의 글은 역사적 상처와 서정적 치유가 공존한다.
새들과 교감하며 점치는 소녀와 소설속에서 울리는 징소리의 은유, 회고하고 후회하는 노인들 치유는 고통 그대로를 바라볼 때 비로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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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시의 목록 - 블랙리스트 시인 99명의 불온한 시 따뜻한 시
안도현 엮음 / 걷는사람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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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엮어낸 시선집
시선집을 그리 즐겨 읽진 않지만..

걱정하는 개소리

서효인

나도 어른이 되었다 그때도 어른이었다
왜 굳이 개를 먹나요,묻지 못하고 어른이니까
묵묵히 고개를 박고 이미 식은 탕에 후우
입김 분다 뜨거울까 걱정이다 오늘도
키우던 개를 먹는 일처럼 산다

야생

김기택

환하고 넓은 길 뒷골목에
갈라지면서 점점 좁아지는 골목에
어둠과 틈과 엄폐물이 풍부한 곳에
고양이는 있다.

좁을수록 호기심이 일어나는 곳에
들어갈 수 없어서 더 들어가고 싶은 틈에
고양이는 있다.
막 액체가 되려는 탄력과 유연성이 있다.

웅크리면 바로 어둠이 되는 곳에
소리만 있고 몸은 없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단단한 바닥이 꿈틀거리는 곳에
종이박스와 비닐 봉투가 솟아오르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작고 빠른 다리가 막 달아나려는 순간에
눈이 달린 어둠은 있다.
다리와 날개를 덮치는 발톱은 있다.

찢어진 쓰레기봉투와 악취 사이에
꿈지럭거림과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이에
겁 많은 눈 더러운 발톱은 있다.

바퀴와 도로 사이
보이지 않는 속도의 틈새를 빠져나가려다
터지고 납작해지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풀잎의 기도

도종환

기도를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풀잎들이 대신 기도를 하였다
나대신 고해를 하는 풀잎의 허리 위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바람은
낮은 음으로 성가를 불러주었고
바람의 성가를 따라 부르던
느티나무 성가대의 화음에
눈을 감고 가만히 동참하였을 뿐
주일에도 성당에 나가지 못했다
나는 세속의 길과
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원수와도 하루에 몇 번씩 악수하고
나란히 회의장에 앉아 있는 날이 있었다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의지하는 신이
같은 분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침묵했다
일찍 깬 새들이 나 대신 새벽 미사에 다녀오고
저녁기도 시간에 풀벌레들이 대신
복음서를 읽는 동안
나는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논쟁을 하거나
썩은 물위에 몇 방울의 석간수를 흘려보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풀들을 보았다
풀들은 말없이 기도만 하였다
풀잎들이 나 대신 기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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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들의 반란 - 저항과 묵시문학의 기원
리처드 호슬리 지음, 박경미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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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묵시문학들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제국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다니엘서나 계시록등 묵시사상(apocalypticism)이라고 통칭하는 경전들이 전하려는 진정한 메세지는 임박한 우주적 종말이나
창조질서의 붕괴 혹은 선과악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심이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모든 생명)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에 대한 저항문학이다.

폭정의 제국들에 빌붙어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신집단(家臣集團)과 변질된 사제집단들에 대한 서기관들의 저항, 하나님의 심판강조, 그리고 회복될 평화로운 삶의 질서에 대한 확신과 격려가 ‘묵시문학’ 작품들의 진정한 의도이다(12쪽)

이 책은 주로 ‘제2성전시대의 본문들’을 다룬다.

다시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상태에서 해방되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BC.520-515)한후 로마제국에 의해 성전이 완전 파괴되는(AD.66-70) 시기이다.

프톨레미왕조의 유다지배시대, 시리아의 셀류커스왕조의 안티오커스4세 에피파네스의 폭정시대, 그리고 로마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헤롯대왕이 폭정을 휘두르는 약 400년동안(BC.312- AD.70) 유대인들의 저항과 신앙투쟁에서 당시 지식이었던 서기관들의 역활과 그들의 목소리를 담고있다.

제2성전 시대의 본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역사적이고 지상적인 삶을 넘어선 종말론적, 우주적 대파국이 아니라, 역사적 위기의 해결로 서술한다. 
이 해결을 통해 천상의 지배가 회복되고 새롭게 된 땅 위에서 이스라엘은 갱신을 이룬다. (21쪽)

당시 서기관들은 유대의 거룩한 전승들(율법)을 기반으로 성전을 지배하는 사제귀족들에게 조언하고 전승된 본문들을 작성/ 필사/보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계층입니다.

교육받은 서기관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 때문에 언제나 통치자의 이익과 뜻을 섬기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통치자들에게 의존했다.
유대와 유대인들에 대한 제국의 통치는 제국 궁정에서건 예루살렘 성전국가에서건 그들의 위치를 더욱 복잡하게 했을 뿐이었다.

제국의 지배가 강화되고 가시적 폭압이 드러나면서 하느님이 유대 백성의 통치자라는 관점과 제국의 지배라는 현실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고 지식인들이었던 서기관들은 저항의 신앙적 틀과 당위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서기관들과 그들이 섬기고 의지하는 사제귀족 사이의 갈등은 더욱 복잡해졌고 귀족계급 내부의 경쟁적인 분파들(사제계급, 귀족, 서기관 등) 사이에 잠재적 갈등이 커져갔다.

서기관들은 유대의 문화적 전통을 함양하는 전문적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제국의 지배에 반대할 논거를 끌어낼 풍성한 문화적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친 제국의 억압은 역사가 하늘의 제왕(the heavenly Emperor)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록이란 통치자들이 자신의 백성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임을 알고 있었던 서기관 집단은 어두운 징조에 대한 기록을 천상제국의 법정에 투사했다. 
지상에서는 하느님이 다스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은 천상법정에서 제국의 억압을 낱낱이 기록해두고 마지막 심판 때 사용하실 것이다.(170쪽)

이 “독립선언” 본문들은 그것을 작성한 서기관 집단 안에서는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것은 절망적 상황에서 그들 자신이 경험했던 계시적인 돌파구(the revelatory breakthrough)에 대한 진술이었기 때문이다.

유대 서기관들은 후원자들에 대한 충성과 계약 율법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중간에 끼어 있다”고 느꼈을 뿐만이 아니라, 고전적인 진퇴양난, 즉 딜레마에 처해 있다고 느꼈음에 틀림없다. 
하느님과 계약에 대한 복종은 제국의 질서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하느님의 계약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약 율법과 예언 전통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계약의 계명들에 개인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로서 유대 서기관들은 쓰라린 신앙의 위기에 봉착했음에 틀림없다. 
하느님과 계명에 충실한 유대인들로서 그들은 계약 율법에 불순종한 데 대한 하느님의 저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역사에 대한 지배권과 창조 때 수립된, 우주에 대한 경륜을 잃어버릴 정도로 멀어지셨는가? 
그러나 불굴의 믿음으로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거나 역사에 대한 지배권을 잃으셨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에녹서와 다니엘서 본문들은 어째서 역사가 통제불능의 상태로 되었는지에 대한 계시이자, 하느님은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하느님은 제국의 통치를 결정적으로 종식시킴으로써 역사의 위기를 해결하실 것이고, 새로워진 땅 위에서 백성들을 회복시킬 것이다.(366쪽)

저자는 제국에 저항한 서기관들의 묵시문학을 통해 오늘날의 신학자,목회자, 지식인들의 역활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세계를 파괴한 제국의 세력이 누구인지 분간하고 명명하는 법을 고대 유대 서기관들로부터 배울 수 있으며,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행동을 함으로써 세상을 풍요로운 인간 삶을 위한 장으로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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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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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는 있어도 혐오할 자유는 없다.

저자는 한국사회의 '혐오' 실태를 분석하고 배제와 폭력의 언어와 가치관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모색한다

"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 특히 소수자의 문제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제약받는 정도가 커질수록 이득을 보는 쪽은 강자다... 
여전히 표현의 자유는 옹호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혐오표현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14쪽)

‘혐오’란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는 태도이다.

'혐오표현'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들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모욕·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들이다.

혐오는 편견에서 자란다.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자란 편견이 혐오로 굳어 감정이 되어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혐오표현이고 혐오표현은 구체적인 차별행위로 이어질 수도 있고 이것들이 제지되지 않으면 증오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같은 집단학살로 발전할 위험도 있다.

혐오표현의 문제에서 의도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쁜 효과를 낳고 있다면 그 자체로 문제이다

혐오표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말한 사람의 의도가 아닌, 소수자 당사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을 혐오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소수자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공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소수자의 관점에서 발언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고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성찰하지 않으면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혐오표현을 어떻게 처벌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저자는 유럽과 미국의 방식을 예로든다..

나치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은 혐오표현 자체를 법으로 제지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국은 혐오표현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발화되지 않는 혐오의 표현을 처벌하지는 않지만 학교, 기업, 언론 등 공공 영역에서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등 형사법을 제외한 거의 모든 규제를 행한다.

"증오범죄법 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증오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입장이다. 
증오범죄법 제정은 편견, 차별, 혐오에 맞서 모든 사람의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편견이 혐오로, 혐오가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백주 대낮에 오로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이주자라는 이유로,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집단 린치를 당하는 비극적 사태는 이제 '임박한' 현실이 된 것이다."(58쪽)

결국 중요한 것은 혐오표현에 대한 법의 역활뿐만 아니라 소수자와의 연대를 통해 혐오세력을 포위 고립시킴으로서 '혐오표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사람과 세력을 고립시키는 것은 백신으로 전염병 확산을 차단하는 것과 같다.

"대항 표현의 가장 큰 의의는 혐오의 지형을 바꾼다는 것이다. 
혐오의 선동은 소수자 집단을 고립시키려고 하지만 대항 표현은 거꾸로 소수자와 제3자를 연대시켜 혐오주의자들을 고립시킨다.... 
당사자 개인 이외에 사건 현장의 목격자들, 그리고 사건을 전해 들은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이 집단적 항의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함께 혐오표현에 대응함으로써 피해자가 아니라 발화자를 고립시키는 것이 대항 표현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126쪽)

악의 없는 농담, 별생각 없는 자랑, 순수한 향상심 속에 차별의 싹이 깃들어 있다. 자기만족과 자기당착에 빠져 타인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혐오의 싹이 내안에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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