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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평점 :
표현의 자유는 있어도 혐오할 자유는 없다.
저자는 한국사회의 '혐오' 실태를 분석하고 배제와 폭력의 언어와 가치관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모색한다
"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 특히 소수자의 문제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제약받는 정도가 커질수록 이득을 보는 쪽은 강자다...
여전히 표현의 자유는 옹호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혐오표현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14쪽)
‘혐오’란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는 태도이다.
'혐오표현'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들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모욕·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들이다.
혐오는 편견에서 자란다.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자란 편견이 혐오로 굳어 감정이 되어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혐오표현이고 혐오표현은 구체적인 차별행위로 이어질 수도 있고 이것들이 제지되지 않으면 증오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같은 집단학살로 발전할 위험도 있다.
혐오표현의 문제에서 의도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쁜 효과를 낳고 있다면 그 자체로 문제이다
혐오표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말한 사람의 의도가 아닌, 소수자 당사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을 혐오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소수자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공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소수자의 관점에서 발언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고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성찰하지 않으면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혐오표현을 어떻게 처벌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저자는 유럽과 미국의 방식을 예로든다..
나치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은 혐오표현 자체를 법으로 제지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국은 혐오표현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발화되지 않는 혐오의 표현을 처벌하지는 않지만 학교, 기업, 언론 등 공공 영역에서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등 형사법을 제외한 거의 모든 규제를 행한다.
"증오범죄법 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증오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입장이다.
증오범죄법 제정은 편견, 차별, 혐오에 맞서 모든 사람의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편견이 혐오로, 혐오가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백주 대낮에 오로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이주자라는 이유로,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집단 린치를 당하는 비극적 사태는 이제 '임박한' 현실이 된 것이다."(58쪽)
결국 중요한 것은 혐오표현에 대한 법의 역활뿐만 아니라 소수자와의 연대를 통해 혐오세력을 포위 고립시킴으로서 '혐오표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사람과 세력을 고립시키는 것은 백신으로 전염병 확산을 차단하는 것과 같다.
"대항 표현의 가장 큰 의의는 혐오의 지형을 바꾼다는 것이다.
혐오의 선동은 소수자 집단을 고립시키려고 하지만 대항 표현은 거꾸로 소수자와 제3자를 연대시켜 혐오주의자들을 고립시킨다....
당사자 개인 이외에 사건 현장의 목격자들, 그리고 사건을 전해 들은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이 집단적 항의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함께 혐오표현에 대응함으로써 피해자가 아니라 발화자를 고립시키는 것이 대항 표현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126쪽)
악의 없는 농담, 별생각 없는 자랑, 순수한 향상심 속에 차별의 싹이 깃들어 있다. 자기만족과 자기당착에 빠져 타인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혐오의 싹이 내안에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