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시의 목록 - 블랙리스트 시인 99명의 불온한 시 따뜻한 시
안도현 엮음 / 걷는사람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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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엮어낸 시선집
시선집을 그리 즐겨 읽진 않지만..

걱정하는 개소리

서효인

나도 어른이 되었다 그때도 어른이었다
왜 굳이 개를 먹나요,묻지 못하고 어른이니까
묵묵히 고개를 박고 이미 식은 탕에 후우
입김 분다 뜨거울까 걱정이다 오늘도
키우던 개를 먹는 일처럼 산다

야생

김기택

환하고 넓은 길 뒷골목에
갈라지면서 점점 좁아지는 골목에
어둠과 틈과 엄폐물이 풍부한 곳에
고양이는 있다.

좁을수록 호기심이 일어나는 곳에
들어갈 수 없어서 더 들어가고 싶은 틈에
고양이는 있다.
막 액체가 되려는 탄력과 유연성이 있다.

웅크리면 바로 어둠이 되는 곳에
소리만 있고 몸은 없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단단한 바닥이 꿈틀거리는 곳에
종이박스와 비닐 봉투가 솟아오르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작고 빠른 다리가 막 달아나려는 순간에
눈이 달린 어둠은 있다.
다리와 날개를 덮치는 발톱은 있다.

찢어진 쓰레기봉투와 악취 사이에
꿈지럭거림과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이에
겁 많은 눈 더러운 발톱은 있다.

바퀴와 도로 사이
보이지 않는 속도의 틈새를 빠져나가려다
터지고 납작해지는 곳에
고양이는 있다.

풀잎의 기도

도종환

기도를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풀잎들이 대신 기도를 하였다
나대신 고해를 하는 풀잎의 허리 위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바람은
낮은 음으로 성가를 불러주었고
바람의 성가를 따라 부르던
느티나무 성가대의 화음에
눈을 감고 가만히 동참하였을 뿐
주일에도 성당에 나가지 못했다
나는 세속의 길과
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원수와도 하루에 몇 번씩 악수하고
나란히 회의장에 앉아 있는 날이 있었다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의지하는 신이
같은 분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침묵했다
일찍 깬 새들이 나 대신 새벽 미사에 다녀오고
저녁기도 시간에 풀벌레들이 대신
복음서를 읽는 동안
나는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논쟁을 하거나
썩은 물위에 몇 방울의 석간수를 흘려보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풀들을 보았다
풀들은 말없이 기도만 하였다
풀잎들이 나 대신 기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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