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평화 영성 - 2008년 노벨평화상 후보, 존 디어 신부의 복음서 묵상
존 디어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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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예수회 소속이며 평화 운동가인 존 디어 신부는 일흔 살의 반전운동가 필립 베리간 신부와 여성운동가 린 프리드릭슨 그리고 또다른 평화운동가 프리드릭 브루스와 함께 세이머 존 미공군기지의 철조망을 뚫고 훈련장에 들어선다.

당시 이라크 침공훈련중이던 F15 전폭기에 접근하여 망치로 내리쳤다. 이러한 실천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 는 말씀에 근거한 행동이었다.

이 일로 8개월동안 감옥에 갇히면서 그들과 함께 복음서를 공부하고 깊이 묵상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담은 책이다

원제는 Jesus the Rebel 이다.
'말썽꾼 예수', '반란자 예수' 이고 영어부제는 'Bears of God's Peace and Justice'(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짊어진 사람들..Bears가 다양한 뜻이 있는데 어떤걸 넣어도 될 듯 ..)이다.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말씀들 중 생애 순서대로 33개의 본문을 택하고 재해석한 책이다.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삶은 세례를 통한 하느님 경험과 광야기도에서 시작된다.

세례를 받은 후 예수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는 중에 예수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다. 
하느님의 영이 마치 비둘기처럼 몸의 형태로 그에게 내려오고,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음성을 들었다. 
이처럼 큰 위로의 말씀이 예수를 변화시켰다. 
곧 하느님의 확언과 승인을 드러낸 그 말씀이 예수에게 용기를 부어줌으로써 자신의 삶을 하느님과의 매우 친밀한 관계 속에 하느님께 충성하도록 이끌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 안에서 불타오르도록 이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선언한 말씀이다.(23쪽)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모든 순간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아갔다. 
그의 이런 자기이해는 마음을 모아 고요하고 친밀하게 기도를 드리는 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 한결같이 비폭력의 길을 고수하는 일, 하느님의 비폭력적인 사랑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일,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는 일과 연관되었다.

세례는 예수 이후 제자들에게도 결단의 순간이었고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다.

처음 3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을 보증하는 것이었으며, 이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한 것 때문에 살해당하곤 했다. 
세례 자체가 제국의 권위에 대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이었다. 
실제로,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곧바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처형되곤 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오늘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요구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추구하며, 병든 사람들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보고, 죽음의 우상을 타파하며,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소비주의를 배격하며, 공동체를 건설하며, 칼을 녹여 보습으로 바꾸며, 평화의 하느님을 예배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사회적 실천을 감당하기 위해 애쓴다면, 우리는 제자직의 날카로운 가시를 느끼게 될 것이며 복음이 생생하게 살아나게 될 것이다.

구조적 억압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 저항을 더욱 많은 그리스도인이 따를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불의한 세력과 공개적으로 대결할수록, 더욱 많은 우리들이 공격을 받고 위협을 당하고 체포되고 투옥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예수에게 그만큼 충성함으로써 성숙해 질 것이며,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은 한 사람씩 낫게 될 것이다.(109쪽)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예수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너희 모두를 죽음의 문화 속에 갇혀 있게 만드는 죽음의 돌을 치워라.
죽음의 문화 속에 가라앉도록 유혹하는 세력에서 벗어나도록 서로 도우며 비폭력의 자유속으로 들어가도록 서로를 해방시켜라.(206쪽)

죽음의 세계에 생명 그 자체를 드러내며 저항한 예수는 자신의 생명마저 온전히 내어놓고 십자가에서 절규하며 죽어간다.

예수의 절규는 불의와 전쟁과 제국의 모든 희생자들의 절규이다.
예수의 절규를 통해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이런 현실에 대해 눈을 뜨도록 애원하시며, 그 미친 폭력을 거절하고, 그 비인간성을 회개하라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애원하신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이 들려온다.

예수의 부활에 대해 알고 싶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싶다면, 제자들처럼 우리들 역시 갈릴래아로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우리 자신이 살아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차례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처럼 오늘날의 가난에 찌든 갈릴래아로 가서, 제국의 당국자들과 예루살렘의 제도화된 불의와 대결한 후, 비폭력의 길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갈 차례인 것이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되며 그 부활 이야기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며 구원자로 예배하게 된다.

절망만을 안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가운데 예수가 나타난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원하지만,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다.

우리는 절망의 문화에 세뇌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며, 비폭력은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은 우리가 몸 바칠 가치가 없다고 믿는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촉구하신다. 
그분은 십자가의 지혜에 호소하며 우리가 그분을 따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도록 초대하신다. 
우리가 희망의 새로운 소식을 듣고, 그 비전을 지닌 낯선 사람을 우리의 식탁에 환영하고 함께 식사를 나눌 때, 우리의 가슴은 흥분으로 타오르게 되며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다.

우리는 비폭력 저항의 공동체로 되돌아가 그의 평화운동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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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반양장) -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아마시타 영애 지음, 박은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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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성노예 / 한국군성노예 / 미군성노예 / 성매매 / 원정결혼...

여성을 매춘부와 정숙한 여성으로 이분화하는 민족논리 위에 구축된 인식은 남성중심주의에 기초한 남성(가부장적)논리이며 여성을 포함한 열린 민족주의가 아니다. (136쪽)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를 민족의 피해자로 받아들이는 인식에는 그들이 '일본군'에 의해 '속아서' 혹은 '강제적'으로 끌려갔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었다. 
'자발적' 이거나 '알고' 간 이들은 '피해자' 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가부장적 사고는 '모든 성노예'를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 이면에는 '성매매'에 대한 가부장적 이해와 편견이 깔려 있었고
'강제성'의 의미를 축소화 시키면서 구조적, 계급적 강제를 만들어낸 '민족내' '자신들'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나 여성학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위안부 문제의 공론화와 '정대협'의 설립과 함께했던 삶의 경험을 서술하며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규정한다.

일본식으로 읽은 성姓과 한국식으로 읽은 명名이 섞인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라는 이름에서 이미 마지널리티(marginality)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내가 일부러 아버지 쪽 조선 성을 붙이지 않고 어머니 쪽 일본 성을 고집한 것도 단순히 호적상의 이름이어만이 아니라 이런 남성우선적인 '민족'의 사고방식에 대한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29쪽)

이 책의 부제 그대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은 경계인이기에 볼 수 있었던 저자의 시각이다.

한국인이 정신대 문제를 피지배민족으로서의 관점에서 대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성의 유린이라는 측면에서도 다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이 경우의 민족은 종래의 성차별적 남성중심적 혈통주의를 기저에 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시점에서 접근하여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45쪽)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한국 사회 내에서는 민족문제로 강조되어
오면서 여성 문제로서의 측면은 그늘에 가려져 왔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운동의 성격상 민족 문제로 다루며 여론에 호소하는 편이 국내의 지원을 얻기 쉽다는 전략상의 의도도 있었지만,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일본군성노예문제를 여성 문제로 확장시키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실제로 한국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위한 단체는 1992년 한국을 방문한 UN 관계자들에게 수절의 상징인 은장도를 선물하기도 했고 1993년에 발표된 고노 담화에 대한 성명에서, 매춘부 출신의 일본인 위안부와 강제적으로 연행된 조선인 위안부를 동렬에 두는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 여성들에게 억압민족에 의한 여성차별이나 민족차별과의 투쟁뿐 아니라 그동안 민족의 이름으로 은폐되고 때로는 정당화되어왔던 자국 내의 가부장적인 체제와도 투쟁할 것을 요구한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로서, 즉 일본에 대한 투쟁으로서만 인식하는 한 이 문제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인식과 실천은 소홀히 될 수밖에 없다. (162쪽)

일본군 성노예의 ‘범죄성’은 위안부의 동원 방식이나 대우 여하가 아니라 일본군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군인의 성욕 처리 등을 위해 정책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을 비롯한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아 성적으로 유린했다는 것 자체에 있다.

위안부 문제는 외국인 여성에 대한 성적폭력행위와 전시의 잔학성에 대한 문제일 뿐 아니라 국가에 의한 여성의 인권침해로 연결되는 (남녀의) 성지배와 통제라는 의미에서 일본인 위안부를 피해자로부터 제외해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인 위안부를 피해자로 보지 않는 한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260쪽)

페미니즘 시점에 기초한 위안부 문제로의 접근은 민족논리에서 소외되어 온 피해자(여성)를 포괄하고, 더 나아가 식민지나 전쟁이라는 경험을 공유해온 남녀노소를 감싸 안음으로써 역사에 보다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교훈을 새길 수 있을 것이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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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라다 - 세월호 세대를 위한 정치철학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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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을 강요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타율적 강제는 파시즘의 전형적인 폭력이다.

남은 것은 ‘일상의 파시즘’을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상에서 남을 권력으로 억압하려 하지 않는 평등한 시민 의식과 부당한 억압에 대해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148쪽)

저자 김상봉은 사랑의 나라를 꿈꾼다.
사랑이 단순히 가족이나 사사로운 인간관계의 원리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원리가 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 길은 기성세대의 몫이 아니다

기성세대는 고갈됐어요. 
기성세대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젊은 세대를 위해 물러나주고 길을 비켜주는 겁니다. 
아무런 새로운 것도 잉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들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면서 모든 일을 스스로 다 처리하고 해결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비극입니다.
이건 여야가 따로 없고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는 문제에요
이쪽저쪽 가릴것 없이 고갈되었어요
사람들이 '가스통 할배들'이나 '박사모'만 늙었다고 타박하는데 예전에 이른바 386이라 불리던 세대로 마찬가지예요(174쪽)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대의의 강요는 그들의 결핍과 착각에서 비롯된것이며 다수가 자신들만의 정의를 소수에게 강제하는 것은 그들을 노예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책 제목 "네가 나라다"는 "이게 나라냐"에 대한 동문서답이다. 
가상 대담으로 엮어진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국가가 우리를 호명하고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주체적, 능동적 사유와 행위를 통해 같이 만들어가는 객체라고 말한다.

국가는 기성품으로 만들어져 주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국가가 아니고, 바로 네가 국가다. 
네 속에 나라가 있다. 
국가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물어라.(36쪽)

더이상 국가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대상으로서의 국가에서 주체로서의 자기에게로 물음의 방향을 돌릴 때 비로소 우리에게 새로운 나라로 통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역설한다.

저자가 주장했던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현실적 실천으로 이행하는 방법에 관한 고민이 담긴 책이다.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압제에 저항하는 용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 요구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자기정립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자기를 정립하는 것만큼 세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며, 사유의 주체성 또한 단순히 추상적 자아의 정립이 아니라 현실의 능동적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즉 자아는 자기정립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현실의 법칙의 입법자일 때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자아가 타율적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그는 타율적 강제 아래 있는 것이요,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도덕법칙이나 인륜적 법칙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아는 오직 자기가 모든 객관적 법칙들의 입법자가 될 때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김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 117쪽)

자신들만의 정의를 세우기전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응답하는 세상이 '사랑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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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 삶의 정치 그리고 살림살이의 재구성을 향해
하승우 지음 / 이매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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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주체는 자기에 눈 뜨며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존재다.

아나키즘은 아나키스트의 숫자만큼 다양한 색채를 지닌 사상이다. 
'자유'와 '사람'이 중심에 있는 아나키즘은 현실속에서 다양한 실천으로 그 혁명적 가치를 드러낸다.

다른 어떤 사회 이론보다도 아나키즘은 인간 생명을 그 무엇보다 귀중히 여긴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근본적으로 톨스토이의 정신에 동의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 생명을 희생하게 된다면 그 상품 없이 사회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생명이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나키즘이 순종을 가르치는 건 절대 아니다. 
모든 고통과 비참함과 병폐가 순종이라는 악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순종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260쪽)

책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저자는 아나키즘을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로 이해한다.

사실 아나키즘의 주장은 '무질서'나 '무정부'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빼앗긴 자기 결정권을 되찾으려는 욕구, 자율적 질서를 향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아나키즘은 모든 권력에 맞선 반대, 모든 조직에 맞선 반대, 모든 질서에 맞선 반대가 아니라, 제어할 수 없고 집중화된 권력을 향한 비판이다. 
따라서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가 적절한 번역이다. (157쪽)

책에서 '반강권주의'로서의 아나키즘은 거대화한 권력을 해체하는 사상적 무기가 되고 권력을 작고 자율적인 공동체 단위로 분할하고 각자의 자유를 위해 지원하고 연대하는 연방주의를 만드는 이론적 기반이 된다.

아나키즘은 중앙 집중화된 혁명 조직이 아니라 각자의 살림살이를 지지할 수 있는 다양한 조직들 간의 연계와 단단한 삶의 그물망이 아직 오지 않은 사회를 도래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도래할 사회는 그 사회를 도래하게 만드는 방법에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하게 믿었다.
손을 잡으려면 서로 마주보며 서로의 존재에 눈을 떠야 한다. 
그런 마주봄의 계기는 바로 교육이다. (235쪽)

연방주의의 과제는 단순히 국가기구를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분권을 통해 지역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그런 지역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며, 궁극적으로 국제적인 규모의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아나키즘의 권력관과 연방주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공간적 의미에서 벗어나면 풀뿌리 운동은 단지 지역운동을 뜻하지 않고 ˝권력을 갖지 못한 일반 대중이 스스로의 삶의 공간에서 집단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과 삶의 공간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가려는 의식적인 활동˝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53쪽)

서로 돕고 보살피는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가진 아나키즘의 정신에 바탕을 둔 연방주의와 협동운동, 분권과 연방주의, 사적 소유와 노예 노동에서 벗어난 살림살이는 현실의 막연한 꿈이 아닌 인간다운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직접행동이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나는 내가 믿는 것을 실천하며 존엄하게 살고 있는가를 실천하며 묻는 과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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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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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관한 이야기

누구보다 딸을 이해하고 싶고 딸의 평범한 행복을 바라지만 뛰어넘지 못하는 이해의 벽 앞에서 절망하고 분노하고 체념하는 엄마..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32쪽)

자신의 살아가는 방식은 이해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섭섭함을 넘어 단절의 길을 선택했지만 아쉽고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엄마를 찾는 딸..

이건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해해 달라고 사정해야 할 문제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권리잖아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갖는 거요.(156쪽)

표면적으로는 레즈비언 딸과 그의 나이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같지만 삶과 사람이 버겁고 힘든 모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걸까.'(129쪽)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임에 대한 아픔과 훼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아프게 깨달았다. 
이대로 딸애를 계속 당기기만 하면 결국 이 팽팽하고 위태로운 끈이 끊어지고 말겠구나. 
이대로 딸을 잃고 말겠구나. 
그러나 그게 이해를 뜻하는 건 아니다. 
동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쥐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푼 것뿐이다. 
딸애가 조금 더 멀리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양보한 것뿐이다. 
기대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또 무언가를 버리고 계속 버리면서 물러선 것뿐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딸애는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른 척하는 걸까. 모르고 싶은 걸까.”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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