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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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나 재현이 잘 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게 잘 되지 않는 고통…… 어느 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이란 오직 그것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쩐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다 거짓말 같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해서 쓰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쓰는 글......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 ...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기호 작가는 1999년 <버니>로 등단한 후 <최순덕 성령충만기>(2004),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2006), <사과는 잘해요>(2009), <김박사는 누구인가>(2013), <차남들의 세계사>(2014)를 발표 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2018)는 네번째 소설집이다.
이기호의 소설을 읽는 다양한 즐거움 중의 하나는 소설의 형식과 문체에 있다.
랩, 성경식 문체, 최면술 언어, 요리 레시피, 피의자 조서,인터뷰 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서술양식을 사용하면서 유머와 환상성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개인의 욕망과 정치성을 드러낸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은 개인이 강조되는 미시사의 모습을 그리면서 환대와 공감에 대해 씨름한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환대한다고 하면서도 상대의 고통이나 상처를 자꾸 자기의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요.
내가 겪은 사례들이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크기의 고통 정도로 상상해서 동일화하는 거죠.
결국 진정한 이해와 환대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그 실패담을 소설로 써보고 싶었어요.(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소설들은 친절하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유로 환대에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습, 오히려 환대가 폭력이 되는 모습까지 그리고 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한정희와 나 중에서)
“아저씨는 우리 미진이도 잘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그냥 좋은 인
연이라고 쓴 거잖아요…… 그건 그냥 쓴 게 맞잖아요…… 씨발, 아무것
도 모르면서…… 내가 왜 책을 파는지…… 내가 당신이 쓴 글씨를 얼마
나 오랫동안 바라봤는지……”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최미진은 어디로 중에서)
어쩌면 선이 하나 더 있었는지 모른다고, 그것은 각기 다른 실이었는
지 모른다고, 생각해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저마다 각기 다른 여러 개의 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의 선으로만 보려는 것은 그 사람 전체를 보려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자기 스스로를 보려는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의심을 하게 될 때가 더 많아졌다.(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 에게)
아까는 나한테 뭐 죄책감을 느끼네 마네 떠들어대더니…… 당신은 그 얘길 왜 쓰려고 하는데? 당신은 죄책감을 느껴? 당신이 뭘 안다고? 당신이 뭘 쓸 수 있다고…… 똥폼은 젠장……"(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표제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서 화자 강민호는 자기만족 하에서 타자를 환대하는 인물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모든 타자를 환대하면서 현실의 타자에게서 직접적인 보답을 구하지 않고, 속물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환대는 누군가의 삶에 직접 들어가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환대가 아니라, 종교적 차원의 도덕적 규범에 의해서 타자의 고통을 해석하고 처신하는 이기적인 환대였다.
누구에게나 친철한 환대는 역설적이게도 타자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베푼 무의미한 환대가 돼버린 것이다.
결국 윤희에게 베푼 두번째 환대가 거절당하는 순간 강민호는 자신의 환대를 돌아보게 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면서도 모든 일에서 ‘귀찮음’을 느꼈던 그는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없이 환대를 베풀어 왔다는 것을 비로서 깨닫고 부끄러원 한다.
이 부끄러움은 강민호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를 향해 한발 다가가게 만든다.
그의 소설들은 환대의 실패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타자는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절대적 환대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은 절망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환대의 가능성은 거기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아무 근거 없는 믿음이기에 맹목적이고 절대적일수 있는 까닭이다.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기호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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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 1 - 로마 제국부터 천 년까지
필립 아리에스 외 책임편집, 폴 벤느 엮음, 주명철 외 옮김 / 새물결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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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에 대한 메타담론에서부터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공(公)과 사(私)를 나누는 벽의 정치성을 이야기한다.
공과사를 나누는 벽의 양편에서는 역사와 일상속에서 수많은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적인 힘은 외부적으로는 공적인 힘의 공격을 견뎌내야 하고 공적인 힘은 독립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욕망을 일정한 한계 내로 억제시켜야 했다.
이 힘의 역학관계속에서 사생활의 영역은 끊임 없이 유동하고 변화한다. 결국 사생활의 역사는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개인과 그것을 엿보고 통제하고자 하는 공적인 삶간의 갈등의 역사이며 개인이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관계사이다.
사생활의 역사 1권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부터 샤를마뉴까지 고대와 중세전기 로마와 비잔틴 세계에서 공민적 삶에 지배된 사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대략 800년~ 1,000년의 역사동안 생성된 사생활의 물질적 틀과 정신적 구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 개인의 사적인 삶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인 공적인 삶과 거의 일치되어 있었고 사생활의 한 축인 결혼은 시민의 의무였고 가족은 사회적 계약관계 였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조국에 새로운 시민을 낳아주기 위해, 또 인류의 번영은 우주의 신성한 계획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해야 했다.
로마인들은 공적인 것을 공무를 담당한다는 의미로 이해했고 공사의 구별은 불분명 했다. 뇌물로 점철된 공직생활은 공익의 추구와 사익의 도모가 혼재한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중세문명을 담당한 게르만인들 또한 공사의 구분이 없었다. 왕은 자신의 국가를 사유재산으로 생각했고, 왕의 사후에 상속을 위해 왕국은 분할되고 쪼개졌다. 오늘날 유럽의 지형은 그 과정가운데 이루어진 산물이다.
훔쳐보기와 드러냄의 즐거움을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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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사랑학 수업 - 사랑의 시작과 끝에서 불안한 당신에게
마리 루티 지음, 권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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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에 관한 집단적 통념은 남녀를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놓습니다.
이는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낫다는 전제를 내포하죠.
그리고 둘의 관계를 본디 적대적인 것으로, 즉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떻게든 ‘져줘야’ 한다고 느끼게 합니다.
게다가 엄청난 노력만이 둘의 차이를 좁힐 수 있다고 암시합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녕 남녀만의 문제일까요?
두 여성이 서로 사귄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 있을까요?
단지 두 사람이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요?
여자 커플은 애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자동적으로 비켜가게 될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원했던 책의 제목은 On Love: Gender, Sexuality, Identity..인데 원제인 The Case for Falling in Love도 한국판으로 오면서 선택하기 힘든 책 제목이 되버렸다.
비판이론과 정신분석학 전문가이자 페미니스트 문화비평가인 마리 루티의 책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판 저자소개에는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전무가라는 소개가 빠져있다.
인터뷰에서는 문화비평가로서 자신을 포스트페미니즘시대를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비판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 책은 남자와 여자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틀에 박힌 오해를 넘어서 섹스와 젠더 그리고 정체성을 기반으로하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힘은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여있는 저자의 관점과 사상에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남녀에 관한 유해한 이분법을 라캉이나레비나스 프로이드의 이론으로 비판하고 퀴어이론을 기반으로 섹스와 젠더의 벽을 허문다.
사랑이라는 당근을 사용하면서 서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관계맺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죠.
하지만 인간은 사랑에 미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 안의 결핍은 즐거움과 생기와 가능성으로 다시 충만해집니다.
인생은 그제야 의미를 되찾죠.
일상의 스트레스와 짜증은 뒤로 물러납니다.
발걸음은 가뿐해지고 불안도 사라집니다.
말솜씨도 좋아져 말속에 지혜가 넘쳐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풍랑 이는 바다의 작은 조각배가 아닙니다.
외려 작은 연못의 큰 배가 되죠.
저자가 예를들어 말하고 비판하는 미드 중에 본게 없다는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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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 - 니체 카잔차키스 서머싯 모옴 쿤데라의 삶의 성찰들
이현우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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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에게 핵심적인 가치는 자유였죠.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은 다르게 말하면 유혹입니다.
최후의 유혹이나 하느님의 부름에 대한 부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신이 선택한 게 아닙니다.
예수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권‘이지요. (83쪽)

니체의 철학으로 고전을 읽는 책이다.

악령이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라고 속삭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니체는 묻는다.
이 질문로부터 현재의 삶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운명에 대한 사랑'과 '초인' 을 이야기한다.

아모르 파티(운명에 대한 사랑)는 영원회귀하는 삶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기쁨,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틀림없이 다시 찾아올 것이지만 그 운명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운명애‘는 초인의 행위이자 극도로 주권적인 행동입니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노예가 아닌 주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37쪽)

운명을 사랑하는 초인은 이미 지나간 삶의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되돌아온다 해도 얼마든지 다시 받아들이는 것,영원히 반복되는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싸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상실,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적극적으로 받아 안는 존재이다.

이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것은 윤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반복되어도 좋을 만한 것으로 최선의 삶을 살라는 주문이기도 하니까요. (66쪽)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도피하거나 수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이를 인식하고 책임지면서, 진정한 삶의 주체로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라는 의미이다.

즉, '운명에 대한 도피'나 '운명에 대한 순응'과는 다른 태도 '운명으로 달아나'는 태도이며 '운명을 사랑'하는 삶이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방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것이다.
무엇보다 언젠가 나는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 중에서)

저자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운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초인 사상으로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과 그 작품들을 해석하고 있다.

운명을 사랑하는 초인의 모습이 가장 잘 형상화된 작품중 하나는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등장하는 예수다.
예수는 구세주의 자질을 지녔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끊임없이 악의 유혹을 받으며 흔들린다. 그러고 마침내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신의 부름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자유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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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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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 그 이름은 우리에게 어떤 성격을 환기시킨다.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페소아적인 감각과 페소아적인 꿈의 질감을.
단 한번도 똑같이 반복하는 법이 없는, 세상의 모든 다른 것과 구별되는 테주 강 위 구름의 색채를.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부조리한 시선을.
깊은 밤 비스듬히 내리는 빗줄기를.
수많은 색으로 해체되는 감각과 느낌들을.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봉인된 삶이라는 현상의 비밀을. (배수아 옮긴이)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가 죽은 뒤 친구들은 그의 방에서 글로 가득찬 커다란 트렁크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그가 평생 써온 원고 2만 7천여 매가 들어 있었고 그 중 불안의 서라 적힌 봉투 5개에 약 350편의 초고와 단상들이 남겨져 있었다. 이후 페소아 연구자들이 150편을 더해 이 책이 만들어졌다.

페소아는 70여개의 異名을 사용해 글을 썼다.
‘가명’(假名)이 아니라 ‘이명’(異名)이다.
가명(pseudonym)은 제 정체를 감추고 제 목소리를 낼 때에 사용하지만 이명(heteronym)은 각각의 이름들이 저마다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다.

페소아는 각각의 이명에 서로 다른 개성과 이력은 물론, 특별한 문체와 별자리까지 부여하며 저마다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부여했다. 자신 안에 있는 통합되지 못한 수많은 인격과 가치관, 생각들을 새로운 페소아(들)로 창조한 것이다.

난 존재하지 않는 패거리를 만들어냈어.
이 모든 걸 실제 세계의 틀들에 맞췄지. 서로 주고받는 영향들에 눈금을 매기고, 우정 관계들을 구체화시키고, 내 안에서, 다양한 관점들과 토론들을 경청했고, 이 모든 것으로 봐서는, 그들 모두를 창조한 사람 그러니까 나는, 가장 거기에 없던 사람이었어.(페소아와 페소아들 중에서)

신이시여, 맙소사,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몇 명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이 간격은 대체 무엇인가? (275)

불안의 서는 그중 리스본의 작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보조회계원 베르나르두 소아레스에 의해 쓰여졌다.
짧으면 원고지 2-3매, 길어야 20매 미만의 단상들은 싫증 , 신비,모호함, 미시와 사소함, 혼돈,위로, 부정, 침묵 등이 아득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들어있다.

내면을 들여다볼 때를 제외하면 우리 모두는 근시안이다.
오직 꿈의 눈동자만이 안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들 안의 영원한 여행자는 우리의 풍경이고, 그것이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소유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떤 손을 어떤 우주를 향해 뻗어야 할 것인가?
우주는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우주다.(229)

페소아 자신도 이 책을 쓰며 많은 위로를 찾았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일관된 '정체성'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격 내에 억압된 다른 인격들의 가능성들을 현실화시키고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닌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이 되는 자유때문 아닐까

나는 읽는다. 그리고 나는 해방된다. 나는 객관성을 원한다. 나는 나라는 하나의 개별체로 존재하기를 멈춘다. 내가 읽는 것은, 나에게 전혀 흥미롭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종종 내 목을 조이곤 하는 양복과는 달리 , 압도적이고 위대한 외부세계의 명료함이다. 모든 이들의 눈에 보이는 태양, 고요한 표면과 그늘진 얼룩을 가진 달, 바다에 가서야 끝이 나는 드넓은 공간들, 흔들리는 초록 이파리를 머리에 인 나무들의 흔들리지 않는 검은 직립, 농장에 딸린 연못의 동요 없는 평화, 계단식으로 정돈된 산비탈 위 포도나무가 우거진 길들.(116)

이 책은 불안에 대한 갖은 해명에 지쳐 있는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불안함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여 불안의 편에 서 있지만 그 입장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나와 나 사이를 커다란 괘종시계의 추처럼 똑딱이며 왕복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 현기증마저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나와 내가 나란히 벽에 기댄 채 헐렁하게 손을 잡고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움직여 나와 나의 테두리를 온전히 가두는 느낌을 아는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현혹으로부터 완전하게 비켜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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