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페소아, 그 이름은 우리에게 어떤 성격을 환기시킨다.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페소아적인 감각과 페소아적인 꿈의 질감을.
단 한번도 똑같이 반복하는 법이 없는, 세상의 모든 다른 것과 구별되는 테주 강 위 구름의 색채를.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부조리한 시선을.
깊은 밤 비스듬히 내리는 빗줄기를.
수많은 색으로 해체되는 감각과 느낌들을.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봉인된 삶이라는 현상의 비밀을. (배수아 옮긴이)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가 죽은 뒤 친구들은 그의 방에서 글로 가득찬 커다란 트렁크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그가 평생 써온 원고 2만 7천여 매가 들어 있었고 그 중 불안의 서라 적힌 봉투 5개에 약 350편의 초고와 단상들이 남겨져 있었다. 이후 페소아 연구자들이 150편을 더해 이 책이 만들어졌다.

페소아는 70여개의 異名을 사용해 글을 썼다.
‘가명’(假名)이 아니라 ‘이명’(異名)이다.
가명(pseudonym)은 제 정체를 감추고 제 목소리를 낼 때에 사용하지만 이명(heteronym)은 각각의 이름들이 저마다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다.

페소아는 각각의 이명에 서로 다른 개성과 이력은 물론, 특별한 문체와 별자리까지 부여하며 저마다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부여했다. 자신 안에 있는 통합되지 못한 수많은 인격과 가치관, 생각들을 새로운 페소아(들)로 창조한 것이다.

난 존재하지 않는 패거리를 만들어냈어.
이 모든 걸 실제 세계의 틀들에 맞췄지. 서로 주고받는 영향들에 눈금을 매기고, 우정 관계들을 구체화시키고, 내 안에서, 다양한 관점들과 토론들을 경청했고, 이 모든 것으로 봐서는, 그들 모두를 창조한 사람 그러니까 나는, 가장 거기에 없던 사람이었어.(페소아와 페소아들 중에서)

신이시여, 맙소사,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몇 명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이 간격은 대체 무엇인가? (275)

불안의 서는 그중 리스본의 작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보조회계원 베르나르두 소아레스에 의해 쓰여졌다.
짧으면 원고지 2-3매, 길어야 20매 미만의 단상들은 싫증 , 신비,모호함, 미시와 사소함, 혼돈,위로, 부정, 침묵 등이 아득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들어있다.

내면을 들여다볼 때를 제외하면 우리 모두는 근시안이다.
오직 꿈의 눈동자만이 안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들 안의 영원한 여행자는 우리의 풍경이고, 그것이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소유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떤 손을 어떤 우주를 향해 뻗어야 할 것인가?
우주는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우주다.(229)

페소아 자신도 이 책을 쓰며 많은 위로를 찾았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일관된 '정체성'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격 내에 억압된 다른 인격들의 가능성들을 현실화시키고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닌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이 되는 자유때문 아닐까

나는 읽는다. 그리고 나는 해방된다. 나는 객관성을 원한다. 나는 나라는 하나의 개별체로 존재하기를 멈춘다. 내가 읽는 것은, 나에게 전혀 흥미롭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종종 내 목을 조이곤 하는 양복과는 달리 , 압도적이고 위대한 외부세계의 명료함이다. 모든 이들의 눈에 보이는 태양, 고요한 표면과 그늘진 얼룩을 가진 달, 바다에 가서야 끝이 나는 드넓은 공간들, 흔들리는 초록 이파리를 머리에 인 나무들의 흔들리지 않는 검은 직립, 농장에 딸린 연못의 동요 없는 평화, 계단식으로 정돈된 산비탈 위 포도나무가 우거진 길들.(116)

이 책은 불안에 대한 갖은 해명에 지쳐 있는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불안함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여 불안의 편에 서 있지만 그 입장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나와 나 사이를 커다란 괘종시계의 추처럼 똑딱이며 왕복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 현기증마저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나와 내가 나란히 벽에 기댄 채 헐렁하게 손을 잡고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움직여 나와 나의 테두리를 온전히 가두는 느낌을 아는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현혹으로부터 완전하게 비켜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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