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 - 니체 카잔차키스 서머싯 모옴 쿤데라의 삶의 성찰들
이현우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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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에게 핵심적인 가치는 자유였죠.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은 다르게 말하면 유혹입니다.
최후의 유혹이나 하느님의 부름에 대한 부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신이 선택한 게 아닙니다.
예수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권‘이지요. (83쪽)

니체의 철학으로 고전을 읽는 책이다.

악령이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라고 속삭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니체는 묻는다.
이 질문로부터 현재의 삶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운명에 대한 사랑'과 '초인' 을 이야기한다.

아모르 파티(운명에 대한 사랑)는 영원회귀하는 삶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기쁨,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틀림없이 다시 찾아올 것이지만 그 운명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운명애‘는 초인의 행위이자 극도로 주권적인 행동입니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노예가 아닌 주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37쪽)

운명을 사랑하는 초인은 이미 지나간 삶의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되돌아온다 해도 얼마든지 다시 받아들이는 것,영원히 반복되는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싸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상실,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적극적으로 받아 안는 존재이다.

이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것은 윤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반복되어도 좋을 만한 것으로 최선의 삶을 살라는 주문이기도 하니까요. (66쪽)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도피하거나 수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이를 인식하고 책임지면서, 진정한 삶의 주체로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라는 의미이다.

즉, '운명에 대한 도피'나 '운명에 대한 순응'과는 다른 태도 '운명으로 달아나'는 태도이며 '운명을 사랑'하는 삶이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방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것이다.
무엇보다 언젠가 나는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 중에서)

저자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운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초인 사상으로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과 그 작품들을 해석하고 있다.

운명을 사랑하는 초인의 모습이 가장 잘 형상화된 작품중 하나는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 등장하는 예수다.
예수는 구세주의 자질을 지녔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끊임없이 악의 유혹을 받으며 흔들린다. 그러고 마침내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신의 부름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자유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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