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환대 -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환영
레티 M.러셀 지음, 여금현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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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Hospitality

'환대'의 담론은 현대 철학의 중요 주제중 하나이다. 
길게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하버마스를 거쳐 짐멜, 뢰꾀르, 레비나스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타자'에 관한 철학은 곧 '환대'의 담론으로 이어진다.

현대신학에서 '환대'는 이론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삶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책의 힘은 러셀이 신앙고백으로서 환대를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살아왔고 그리고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데 있다.
(실은 러셀이 쓴 글을 사후 편집한거니 다른게 해석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러셀에게 ‘환대’란 위기에 봉착한 우리 세계를 치유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의 환영(welcome)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환영은 차이를 넘어서 연결하는 우리의 행동 속에 각인되어있다.

탈식민주의 글쓰기가 그러하듯이 러셀 또한 주변부로서의 자신의 삶의 자리와 경험에서 글쓰기를 시작한다.

러셀은 여성 입학이 허용되지 않던 당대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학칙 변경을 주장하여 입학이 허락된 최초의 여성일 뿐만 아니라,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신학자 그룹에 속했고, 사별과 이혼, 목사 아내라는 잘 맞지 않는 옷, 뉴욕 동부 할렘가의 교회 사역,남성중심적 교단과 대학에 속한 페미니스트 교수이자 목사, 양성애적 레즈비언이라는 성적 지향성, 그로 인한 성직에서의 퇴출 등 그녀의 삶은 늘 주변부에 있었다

이와 동시에 러셀은 그러한 주변부적 삶의 경험이 어느 누구도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는 하느님의 환대를 체험할 수 있었고 그것을 타인들에게 실천할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러셀은 수세기 동안 우리를 지배해온 식민주의적 사관으로 잘못 해석되어진 성서 해석학을 바로잡는다.

러셀은 (1) 의심의 해석학을 동원함으로써 여성과 동성애자 등 억눌린 집단의‘본문에 희롱당함’(textual harassment)을막기
(2) 가부장제를 인식하고 대결하기 
(3) 성서적 명령과 오늘 현실 사이의 모순점 찾기
(4) 약속(commitment)의 해석학. 여기서 약속이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성서본문 안에 하나님이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 두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읽어나갈것을 당부한다.

이 책 제목인 공정한환대란 이 세상에서 우리가‘저쪽 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위기의식을 치유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행위에 참여하기 위해 차이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다.”

'환대'는 호의나 관용과는 다른 혁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차이'와 다름'의 축제로 우리를 초청하며 자본주의적 관계 '거래' 와 '교환' 의 관계를 부수고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상호환대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간다.

저는 성서의 첫째 계명이‘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틀렸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단 한곳에 나옵니다. 그러나 서른 곳 이상에서 성서는 낯선 자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낯선자를 사랑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아서 피부색깔도,
신앙도, 배경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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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177
자크 데리다 지음, 남수인 옮김 / 동문선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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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우리에게 '이방인'을 '환대'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방인'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이 오는 것이며 그(그녀)가 곧 예수라고 선포한다.

'환대' 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현대 사회에서 다문화, 다원성, 세계화, 난민과 이주민의 문제는 이질성의 상호 공존에 대한 담론과 실천을 요구한다.

상호 이방인간의 만남은 '주' 혹은 ;'객'의 관계에서 관용 혹은 환대를 요구하거나 요구받는 타자로서 만나게 된다.

데리다는 관용과 환대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환대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관용은“자비의 한 형태”로“최강자의 논리”편에서 베푸는 일종의 시혜로“환대의 조건”이라기보다는“환대의 한계”이다.
관용은 타인을 향해 선한 얼굴로 가장했지만 심중으론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즉 일정한 선을 그어 넣고 일정 부분까지만 타자를 용인하겠다는 태도다.

이를 데리다는“주권의 선한 얼굴”(the good face of sovereignty)이라 표현했다.

“주권은 높은 자리에서 타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널 그냥 내버려 둘게. 넌 못 봐줄 정도는 아니야. 여기 내 집에 네가 있을 자리는 있어. 하지만 절대로 이걸
잊어서는 안 돼. 이게 내 집이라는 사실을...”

환대의 이상적 형태로서 "절대적 환대란 나의 집을 개방하고 성과 이방인이라고 하는 사회적 지위등을 가진 이방인뿐만 아니라 이름도 없는 미지의 절대적 타자에게까지도 거처할 곳을 주고,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발생하는)상호성을 요청하거나 심지어 그들의 이름을 묻는 것 없이, 그들이 오게 놔두고, 도래하게 내버려두며, 내가 그들에게 제공한 장소에서 그것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절대적 환대는 관용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절대적 환대는 스스로를 주인이면서도 동시에 손님으로 여기는 태도다.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가 이상적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한다.

현실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조건적 환대는 관용의 수준에서 정치(법)로서의 환대”이며 “주인”이 언제나 특정한 조건들을 전제하여 그 환대의 성격이나 내용을 규정하는 환대이다.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 사이에는 언제나 커다란 거리가 있다. 
환대의 실천은 이 두 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야 한다. 
추상적인 의미의 “절대적 환대”를 지향하며 구체적인 정황에 따라서 환대의 내용과 그 적용이 달리해야한다.

'환대'는 신학적으로 '이웃' 즉 '예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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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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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ence: Six Sideways Reflections

질서를 잘 지키는 시위가 성숙한 시민의식의 발현이라는 관념은 어디서 오는가? 
'비폭력' 시위가 바른 시위문화라는 생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맑스는 '자본'중에서 '본원적 축적'을 다룬 장에서 “폭력은 새로운 한 사회를 잉태하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에서 그 산파역할을 한다”고 적고 있다.
맑스의 관점에서 폭력은 현존하는 낡은 사회 상태로부터 새로운 사회 상태를 산출하는 물리적 힘이자 해방적인 힘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보다는 비폭력을, 갈등과 대립보다는 상호적 인정과 관용의 덕목을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선호 한다.

폭력을 개인적이고 집단적 차원에서 행사되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행위로만 인식하는 것, 
폭력을 비폭력과 대립시키고 후자를 전자에 비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비폭력과 관용의 정신을 실천하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가시화되지 않은 진짜 폭력이다.

'비폭력'을 '평화'와 등치 시키거나 '폭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폭력, 주관적 폭력이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오히려 구조적이고 상징적인 폭력 즉 객관적 폭력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폭력과 싸우거나 관용을 장려하는 우리의 노력'을 지탱하는 폭력을 식별”하라고 권한다.

기든스의 말처럼 문명화(civilization 이른바 성숙한 시민의식이라고 칭하는..)는 폭력의 강도를 완화하고 그 빈도를 감소 시키는데, 이는 개인과 집단의 사적폭력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국가의 폭력 독점을 암목적으로 동의함으로서 성취된다

폭력을 포기해버린 저항은 대의/자유 민주주의에 헛된 희망을 걸고 그 공격성을 상실해 버린다.

민주주의 메카니즘을 모든 변화를 이루는데 궁극적 프레임으로 받아드린다는 것은 민주주의 환상이고 바로 이 환상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공격성을 상실해 버린 저항은 권력이 정한 한계선을 넘지않는 통제된 저항으로서 지배권력과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시킨다.

지젝은 '몫 없는 자들' 이 전 지구적으로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짜 폭력이고 부정의이며 억압이라 말한다.

'몫 없는 자들'에게는 민주주의로 세워진 국가라는 존재 자체가 폭력이다.

지젝은 그들에게 제 몫을 돌려주기위한 모든 '폭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이를 '신적폭력' 이라고 불렀다.

신적 폭력이 발생하는 순간은 자본주의 질서의 근본을 뒤흔드는 하나의 해방적 혁명적 진리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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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널리티 - 다문화 시대의 신학
이정용 지음, 신재식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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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ginality: The Key to Multicultural Theology

10년이 넘는 캐나다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게 '정체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체로 남아있다. 
여전히 marginal person 으로 다양한 주변/경계의 자리를 맴돌고 있다, 
한국과 캐나다 두 사회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두 세계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주변/경계성 경험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성찰하게 하고 삶의 지평을 확장 시킨다. 관점의 창조적 확장이다.
두 세계 사이(between)에서 동시에 두 세계 모두(both)를 경험하는 주변/경계성의 자리는 단순한 언어적 문화적 혹은 인종적 주변/경계를 인식하는 차원으로만 국한 되지 않는다 
오히려 차별/분리의 경계를 깰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이정용 교수가 서술한 『Marginality』는 주변/경계성이 신학의 방법이고 실천의 자리이다. 
Marginality는 예수의 삶의 자리이고(였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 자리(였고)이다.

주변/경계는 '중심적사유'에서 바라본 관점일 뿐이며 주변/경계인으로서 내가 '주체'가 되는 순간 나의 자리는 중심의 자리를 해체시킬수 있는 무기가 된다. . 
“두 세계 사이에서 … 주변부 사람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변성을 극복하는 새로운 주변부 사람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100쪽) 
“두 세계를 초월하거나 넘어선다는 것은 존재하는 두 다른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 중 어느 한 쪽에 묶이지 않으면서 두 세계 모두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101쪽)

예수는 그러한 주변/경계인의 삶을 온전하게 살았냈다. 
로마/유대, 신/인간, 유대인/이방인, 지배/피지배 의 경계에서 살았고 
마침내 피조물과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마저 거부를 당했다. 
그의 삶은 외로움과 고통으로 점철된 주변부 인생이었다.

죽음에서 부활 예수의 생명은 부정을 넘어서는 부정으로서의 혁명이다.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것은 아니며, 세계적 변혁의 행위주체이지만 세상과 같아지지 않는다.”(240쪽)

주변적 경험을 통한 주변성의 극복, 
고통을 통한 고통의 극복, 
수치의 경험을 통한 수치의 극복, 
소외의 경험을 통한 소외의 극복, 
고독을 직면한 고독의 극복, 
무의 경험을 통한 전체성의 회복,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창조적 변혁으로서의 주변/경계성의 극복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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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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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국 행복의 기원

오늘날 심리학과 결합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일단의 ‘행복산업(Happiness Industry)’은 거대한 이익을 산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물건' 만 '소유' 하게 된다면 행복할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지나 '문화' 만 '향유' 한다면 행복이 생긴다고 말하던 시대를 넘어서 '심리' 를 '치유' 하기만 하면 행복이 올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긍정이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줄거라고 사기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오 놀라운 자본주의여

이 책은 "낙관적으로 생각을 바꾸면 행복해진다"고 조언하는 책들에 대해 '공허한 말장난'이라고 단언한다. 
손에 못이 박힌 사람에게 '안아프다고 생각하면 안아플거예요' 라고 말하는 거랑 머가 달라....라고 말한다..

이책은 다행히도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 에 대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why?”를 묻고 있다. 행복이라는 경험을 인간이 왜 하는지, 또 이 경험의 본질적인 기능이 무엇인지 그 답을 찾는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인생을 산다고 믿지만,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통념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행복(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했다. 이제 행복이 삶의 목적이 아닌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된다.

행복은 유전자의 생존과 보존에 이로운 쪽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수단이다.
행복을 느끼는 방식은 유전자에 기인한다.

행복이라는 도구는 우리를 사람들과 무리짓게 하고 어울림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도킨스의 표현된 확장형(이기적유전자가 아니라..)의 심리학 버전..

결론은..
긍정심리는 개뿔 말도 안되고 
행복에 대한 거창한 환상을 깨고 현재 일상에서 작은 즐거움을 주는 것 혹은 상황을 자주 만들고 그것들을 음미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밥먹는게 제일이다...

책 내용 그대로 강연한 영상입니다.
http://www.ktv.go.kr/vodplayer.jsp?cid=508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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