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 폭력의 시대를 넘는 페미니즘의 응답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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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는 여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오직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만 의미 있는 존재로 취급되는 타자화를 말하는데, 이때 여성은 남성과 맺는 관계를 통해 정의되거나 남성들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역할로서만 존재하게 될 뿐 남성과 궁긍적으로 동등한권리를 가진 개인으로 인식되지도 인정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남성동성사회는 여성 없는 사회가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다. 반면 여성동성사회의 상상력은 남성 없는 사회, 분리주의에 바탕을 둔다. 이는여성혐오와 같은 방식으로 남성혐오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한편, 대중화된 여성운동의 일부 흐름이 분리주의에 기반한 남성혐오를 주된 감정정치적 동학dynamics을 사용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없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것이 반응적 성격이라는 맥락이 이해될 필요가 있다. - P31

성차별과 젠더 기반 폭력은 2000년대 이후 명시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입법의 공백과 더불어 행정의 무능과 무지가 겹친 상태에서 사실상 방치에 가까웠고, 법이 만들어진 이후에 오히려 차별과 폭력에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군 가산점 논란 이후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에서 형성된 ‘권리만 주장하지, 의무는 지지 않는다는 여성 인식은 이른바 ‘가성비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간베스트에서 유행한 ‘보○○치‘ 등의 단어는 성별을 자원으로 삼아 남성을 선택하는 여성에 대한 분노를 담은 말이다. 그 이전에 만들어져 유통된된장녀나 김치녀‘ 등은 모두 불필요한 소비를 하는 여성을 비난하는 말인데, 이러한 멸칭을 만들어내는 배경에는 이성애 데이트 관계전반이 불공정한 거래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 P40

20대 남성들이 여성혐오와 안티페미니즘 등으로 결집하는 이유는 보통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이행 이후 남성적 특권이 보장되기 어려운 상황을 불안해하는 위기의식의 단면이라고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이것은 남성/성의 위기라기보다는 변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즉 남성은 이제 자신을 생계부양자 또는 유일한 임금수입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서 권력이 나온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차별을 통해 특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대도 저물었다. 이러한 조건의 변화 속에서 남성은 인터넷상에서 가장이 아니라개인으로,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 자신을 정체화하기 시작했다.
소비자의 처지에서 차별은 팔지 않거나 차등 가격을 매기는 것으로이해된다. 가진 것이 있건 없건 지금 남성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고 - P41

욕하는 여성 형상이 꽃뱀인 이유다.
차별을 통해 특권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믿는 이 세대의 남성은 자신이 오히려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차별의증거는 사실 별로 없거나, 대부분 억지거나, 아니면 아주 예외적인사례에 한정된다. 큰 단위의 통계에서는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적고, 직업 선택의 기회나 승진에서 차별받는 것, 경력단절을 비롯한육아 고충의 문제, 성폭력을 비롯해 젠더 폭력의 희생자 비율에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 등 명백하게 여전히 성차별적인 사회다.
하지만 남성들은 이런 사실을 믿지 않는다. 자신이 그런 차별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세계는 곧 자기자신이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평등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가짜 뉴스를 반복 인용함으로써, 엄존하는 성차별을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공교롭게도 대부분 남성이다)에게만 보이지않는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 P42

있음을 경고하는, 뼈아프게 새겨두어야 할 역사다.
어떤 가해자는 왜 그렇게 빨리 제거되고 사적이든 공적이든 처벌을 받는데, 어떤 가해자는 왜 그렇게나 관용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실제로 기존의 통념이 제공한 성범죄자의 전형에 들어맞고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큰 집단에 속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수사기관과사법부는 별다른 의심 없이 사건을 조사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상식에 맞는 판결을 내린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한 것이 성폭력 문제의 한 축을 받치고 있는 통념이라면, 가해자 같은 가해자에게만 처벌이 이루어지는 것 역시 반드시 깨져야 할 선입견이다. 이 통념과 선입견 때문에 강간은 언제나 소수의 예외적인 비극이 되었고,
피해자는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의심받았으며, 가해자일 법한극소수의 가해자만 처벌을 받았다. 이렇게 강간이라는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부정의가 발생하는 순간에 집중해보면, 강간이라는 문제가왜 그렇게 축소되어왔는지, 왜 그렇게 강간을 둘러싼 통념이 바뀌지 않는지 알 수 있다. - P88

밝히는 일 정도는 하지 않냐고 말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내가 모든 남성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말이 나올때 선을 넘는 남성이 있기는 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단톡방에서, 에브리타임에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강간을 입에 올리며 자신의 성적 에너지를 과시하는 행동 등을 말한다. 모든 남성이 그런 건 아니나 남성 대부분은 이런 이야기에 노출되어 있다. 공모자가 되거나 방관자가 되거나 주변인이 되거나 그들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거나 관련된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남성들 사이에서도 그런 말들이 정상적으로 취급되는 것은 아니에요." K씨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 P90

남성은 계급이 아니며 여성 역시 그렇다. 그렇다고 특정한 조건의남성을 유형화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남성성은 언제나 변화하고 경합적이지만, 남성성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남성이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남성은 대체로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남성성 연구에 필요한 태도는,
아니 모든 종류의 젠더 연구에 필요한 태도는 교차적 관점이다. 교차적 관점으로 젠더를 연구할 때 집단으로서의 남성을 유형화할 수 있다. 젠더 연구는 젠더에 관한 연구인 동시에 젠더와 상호작용하는 다른 범주의 영향력을 기술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존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둘러싼 문화적 가정법들을 계속 반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70대 경상도 남자들의 남성성을 연구하려면 계급과 세대, 지역적 특징 같은 표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젠더를주요 분석범주로 사용해야 한다. - P91

히 최근 극단적으로 유해한 남성들이 남성 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상황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줄이기 위해서는 남성 일반이 모두 문제라는 말보다는, 가장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요인을 찾아내고 그 영향력을 줄일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최근에는폭력의 문제를 전염병처럼 취급해서 핵심 원인과 감염 정도를 분류하고 각각 노출된 정도에 따라 격리수용부터 오염제거, 재교육 등 문제해결을 위한 접근법을 달리하자는 제안도 있다. - P111

윤리 - 정치적 전환으로서의 미루1
인간은 타인에게 공감받고 싶어 한다. 타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구성되어야 한다. 피해에 쉽게 동일시하거나 가해자를 쉽게 타자화하지 않을 때 타자의 고통을 존중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회가 가능하다. 모두가 동등하게 한 명의 인간이자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이라는 감각을 유지할 때 동일시와 타자화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며칠, 단 하루, 또는 단 한 시간 동안이나마 희망이 실현되고 환희가 작열하고개인과 집단 간의 경계가 제거된 세계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 경험은 소중한 기억이 되어 앞으로의 항해를 견딜 - P139

강간에 대한 정의는 강간이 누구의 무엇에 대한 죄인지에 따라 달라졌다. 오랫동안 강간은 (피해) 여성이 아니라 (여성을 소유한) 남성에 대한 침해였다. 폭력의 역사를 수집하고 기록한 스티브 핑커StevenPinker에 따르면 전 세계의 도덕과 법체계에서 강간은 여성의 아버지에게서 딸의 처녀성을 훔치는 행위로, 남편에게서 아내의 정조를 빼앗는 행위로 규정되었다. 강간을 뜻하는 단어 rape‘는 ‘ravage(파괴),
rapacious(강탈적인’, usurp(탈취)와 어원이 같다. 전쟁 중에는 강간이 병사들의 권리였고 여성은 전리품이었다. 중세 유럽 국가에서 사법 정의가 국유화되면서 강간이 비로소 국가에 대한 불법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가는 결코 성 중립적이지 않았다. 판사와변호인은 "움직이는 바늘에는 실을 펠 수 없다", "꽉 끼는 청바지를남이 벗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로 여성의 의지에 반해 억지로 성관계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강간은 ‘폭력‘이지만 ‘문화로 - P146

강간의 핵심은 사람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도덕적 침해에놓여 있다. 침해는 사실상 강간과 같은 말이다. 강간범의 목적은 피해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지배하고, 모욕하며,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데 있다.)이 같은 생각은 1995년 서울대 조교 사건 항소심 공판에 이화여대여성학과 대학원생들이 제출한 의견서에도 등장한다.
성기 노출에서부터 강간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특징은 남성이 여성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학대하고 강요하며, 힘을 사용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행위들은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는 점에서 서로가 통할 수 있고, 쉽게 구분되지 않는 연속적인 요소와 사건들이며 이 각각은 모두 성폭력인 것입니다 - P149

속해서 이 단어가 가진 한계를 우려하고 걱정해왔다. 그중에서도특히 정희진은 피해자중심주의는 여성주의적 언어가 아니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피해자에게 객관성의 지위를 독점하도록 하는 것은 남성 중심적 사회를 해체하지도, 객관성에 관한 새로운 인식론을 전개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28) 이렇게 되면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 증명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떠넘기는 부작용마저 막을 수 없게 된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피해 여성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의 목소리를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29) 나 역시 다른 글에서피해자중심주의가 피해자 되기 경쟁을 만들어내서 결국 피해자의경험을 존중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30) - P164

없다. 여성주의적 원칙으로 이견 없이 제안된 바 있는 것은 수사와재판 절차에서의 성인지감수성이다. 절차에서 성인지감수성을 견지하는 것과 피해자의 의사대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다른데도,
많은 사람은 가능하면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피해자중심주의로 이해한다.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다. 피해자 개인에게 사건의모든 규정과 처벌방식까지 일임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부담을 지울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사회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피해자는 계속 변화하는 존재이며, 피해 경험은 피해자의 삶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주체성이 변화하는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 P165

성폭력 예방 교육에 소리를 질러라, 저항하라, 의사 표현을 분명히하라 등의 말은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목숨과 안전이 가장중요하다는 말은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자는 위기의 순간에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가해자와 협상하고, 달래고, 때로는 가해자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척하기도 한다. 하지만 법정에 가면 이 모든 행동이 개인의 안전을 위한 합리적 행동이 아니라 동의를 했다는모호한 증거로 이해되곤 한다. 피해자의 거부 의사는 가볍게 부인되고,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의심스러운 행동이 된다. 이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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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가 거듭될수록 우리가 함께 겪었던 시절에 대한 소회나 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마지막 편지에는 "상실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소중함도 있어.
네가 그래"라고 어디서 베껴 온 건지 뭔지 모를 말까지 써놔서, 얘가 술 먹고 편지를 쓴 게 분명하다 싶다가도 괜히감동 같은 것까지 받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보급용 편지지에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재희에게"로 시작하는 답장을 꾹꾹 눌러쓰기까지 했다. - P19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45

재희니까.
재희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둘만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전적으로 우리 둘만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라도. - P53

그렇게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P90

나의 뒷모습해가 뜰 때쯤 그와 나는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그의 집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집 옆 건물 상가에는 세탁소가 있었다. 이른 아침 세탁소가 열려 있을 때면 그는 내두 발자국 뒤에서 걸었고, 닫혀 있을 때면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걸었다.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게 좋아 일부러 집에서 일찍 나설 때도 있었다. 그렇게 큰길까지 나간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첫차가 올 때까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내가 버스에 오를 때면 그가 내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그가 계속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꾸벅꾸벅 조는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버스가 코너를 돌아 완벽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내 뒷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완벽히 없어져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내게 손을 흔드는 그. - P119

나는 그를 잡지 못했다. 대신 그가 문을 나섰을 때 곧장 베란다로달려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그의 뒷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그 모습이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서. 그가 완벽히 사라질 때까지, 하나의 점이 되어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그의 모습을 내 눈에 담았다.

그날의 엄마는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그게 엄마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사실은 내내 내게 묻고 싶은말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만 할 게 있지 않냐고, 당장이라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삽관돼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게 누구건 무슨 내용이건 이유 없이 패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다 똑같은 사랑이다, 아름다운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변질되어 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뭘?
- 정말 미안한데,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동안 울 시간은 충분했다. 종이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물 내리기를 반복한 나는 숨을 고른 뒤 빈 가방을 다시 둘러맸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정말이지 일사천리로 나는 사회로 반환되었고, 내게 닥친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했지.
독창적 별명 짓기.
카일리 미노그를 듣다 꼬여버린 인생이라 카일리라고지은 건 아니고, 그냥 이름이 예뻐서. 어차피 이것이랑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 할 판인데 나 듣기에 제일 예쁜 이름을 붙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카일리 - P193

규호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
ㅡ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살다 보면 별일 다 있는데.
— 그래도…… 왜 웃으면서 말해, 슬프게,
- 울어도 내가 울어야지. 왜 네가 우냐.
그렇게 한참 동안 우는 규호를 바라보았던 나. 우니까되게 못생겼다. 못생겼는데 귀엽다. 귀여운데 가엾다. 내가 얘를 가여워하는 게 웃기기는 하지만, 규호가 콧물을삼키며 말을 했다.
— 있잖아, 내가 고양이를 엄청 좋아해. 근데 못 길러.
알러지가 있거든.
-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데.
너, 뚱뚱하고 못된 고양이같이 생겼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뚱고라고 부를게.
카일리만큼이나, 독창적이지 못한 별명이네, 그치만좋아.

우리가 같은 집에서 잠들었던 마지막 밤, 나는 먼저 잠든 규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죽은 듯이 자는 규호, 너는 왜 잘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걸까. 꼭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언제나 남의집에 얹혀살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내 탓일까 네 탓일까,
아니면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걸까. - P249

주택청약 당첨, 포르셰 카이엔, 첫 책 대박 나게 해주세요…… 뭔가 다 내 진짜 소원이 아닌 것 같아 빗금을 쳐서지워버렸다. 아마도 그러는 사이 구멍이 나버린 것이겠지.
나는 결국 풍등에 두 글자만을 남겼다.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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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 개정판
김영서 지음 / 이매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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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을 당할지도 모를 사람이 매사 조심하고 의심하는 게 성록 력 예방이 아니다. 성폭력 예방 주사는 사회 구성원 모두 맞아야 하는 게아닐까? 내 아이가, 내 친구가, 내 가족이, 내가 성폭력을 당할지도 모른못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이 겪어내고 극복한 일을 영웅담처럼 시다. 그런 우리가 또한 이 사회다.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을 좀 바꿔서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에 관해 좀더 쉽게 말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사회를 만드는 것.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키우는성교육을 하는 것. 아이들과 여성들이 혼날까 두렵거나 부끄러워 말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이 겪어내고 극복한 일을 영웅담처럼 시원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진짜 예방 주사가 되지 않을까? - P126

"오늘이 전국의 고3 수험생들이 수능 시험을 보는 날이죠, 지금 수능 시험장을 향하는 학생들과 함께 계신 부모님들께서는 어깨도 토닥여주시고, 너무 긴장하지 않고 시험 잘 보도록 따뜻한 말 한마디도 해주시면 좋겠어요."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그때의 라디오 방송 멘트, 택시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말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불쌍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도 저런 부모 밑에서 자랐으면, 그랬으면 어땠을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주체할 수 없었다. 차창을 바라보며 고개를들어올렸다. 울고 있는 것을 들키면 갑자기 차를 세우고 내리라고 할까봐 걱정됐다. - P159

이런 경우 말하고 난 뒤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의 반응이 영 아니었다 하더라도 움츠러들지자.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안전장치 없이 내가 말하고 싶은 대상에게, 내가 말하고 싶은 때 하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낸 느낌이었다. - P186

"자기 상처의 깊이에 갇혀 ‘뭐 저걸 가지고 힘들다고 난리야?‘ 그런생각을 넘어설 때 너는 진짜 멋진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거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상처로 아프고 힘든 것이다. 네가 가장 힘든 건 아니다." - P188

상대방의 반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하고 난 뒤의 내 반응이었다. 상대방도 상대방이지만 내가 괜찮으면 괜찮다.
중요한 것은 ‘노출 뒤 내 마음은 어떤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시원하고, 내가 편안한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노출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기자신을 두는 게 좋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 P188

꼭 타인과 벌이는 싸움만은 아닐 수도 있다. 자기 자신하고도 처절하게싸우고, 이겨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이 다가오면 피하지 말기를 바란다. 싸울 때는 상대가 타인이든 나 자신이든 열심히, 끝까지 싸우는 게중요하다. 시작했다가 물러서거나 참으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되고, 점점 위축될 수 있다. - P201

그러나 지금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 뒤, 어느 날 내가 툭 털어놔도 서로 놀라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 욕심일까? 아무튼 난 정말 어느 날 자연스럽게 당신 앞에서 ‘툭 터놓을 거다. 세상의수많은 ‘수연‘이들이 터놓을 수 있게 좀 놀라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리고성폭력 당했다고 그 사람들의 인생이 끝장난 것은 아니니 너무 불쌍히여기지 말아주면 좋겠다. 또 하나, 당신에게 부담주려고 하는 이야기는아니니 절대 부담 갖지 마시기를.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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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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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지.
나는 내 살림 해야지.
너 하는 게 살림이냐.
살림 아니면,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게 그게 무슨 살림이냐.
내 집에서 나 사는 게 살림이지. 내 살림도 바쁜데 내가어떻게 엄마 살림을 해요.
그러니까 한시라도 바삐 들어와 배우라고 나 죽기 전에.
왜 자꾸 죽는다 그래.
내가 이러고 오년을 더 사냐 십년을 더 사냐.
못됐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야 못됐다고 하냐 엄마한테.
말을 못되게 하니까.
이년이. - P20

오래전에 네 아버지하고 여기 온 적 있었다고 이순일이말했다. 버스를 타고, 그때는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차창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가 이는 길을 몇시간이고 왔다고, 지금처럼 여기로 편하게 올라오는 길도 없어서 능선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서 마침내 묘에 다다랐는데, 절할 때 보니 네 아버지가 저만큼 떨어져서 뒷짐을 진 채 굳이 돌아서 있더라, 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기서 뭘 하느냐고 이리 와서 절 올리라고말했더니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고 잡소리를 하기에 너무 당혹스럽고 열받아 그걸 말이라고하느냐고, 얼른 절 올리라고 역정을 냈는데 그걸 듣고도뒷짐 지고 서 있더라며 그뒤로 야속하고 징그러워 같이오자고 하지 않았다고, 네 아버지와 동행한 것은 그것딱 한번으로 그쳤다고 이순일은 말했다. - P27

당신은 위대하다.
한세진은 그 메시지를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그다음엔 미간에 살짝 뿔이 돋는 듯한 느낌으로 화가 났고, 그게 뭐였는지, 왜 그것이 모욕감과 닮았는지, 자기가 왜 그런 걸 느꼈는지를 나중에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한만수는 그것을 영어로 들었을 텐데 그래서인지 말투가 좀 영어였지. 홀을 쥔 왕이 그것을 하사하듯 그 애는 엄마에게 그렇기 말했지. - P34

돈이 사라졌다는 당혹감보다는 시치미를 떼는 동생들이 괘씸해 한영진은 분노했다. 하지만 이제 봐라, 아버지가 판단할 것이다, 그가 도둑을 밝혀내 망신을 주고벌을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동생들을 노려보고있을 때 한중언이 말했다. 너희 중에 누군가는 더러운거짓말을 하고 있어.
너희 중에 누군가.
라고 한중언은 말했으나 그 말을 하면서 그는 한영진을보고 있었다. - P55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려보는 것. 말하고 싶고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바뀐 것 아니냐고 다른 사람의 아기가 아니냐고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P73

내가 몇시에 퇴근하는 엄마는 부엌에 불을 켜두고 나를기다렸어. 다른 식구들이 다 자고 있어도 엄마는 자지않았지. 매일 늦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금방 지은 밥하고 새로 끓인 국으로 밥상을 차려줬어.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 P81

엄청난 사물의 밀도 때문에 누구도이순일의 방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순일은 그것에 만족했다. 미로의 끝인 침대에 누우면 커튼을 달지않은 창으로 하늘이 보였다. 이순일은 그 자리에서 혼자였고 편안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자주 뭔가를 잃어버렸다. 좋은 것이 생기면 나중에 잘 쓰려고 거기 어딘가에 넣어두곤 했는데 둔 곳을 종종 잊었다. 내가 너무 잘두는 바람에, 그럴 때마다 그렇게 말했고 그 좋은 것을끝내 찾아내지 못해도 크게 상심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진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잊은 것일 뿐, 거기 다 있을 테니까. - P111

누가 오지 않는다. 궤짝에 담긴 조기 한뭇에 소금을 뿌리거나 하며 이순일은 생각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누가 안 와. - P119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 P138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 P142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내 아버지는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고 말했는데. - P146

그 두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그 말을 들었을 땐 기막혀 화만 났는데 요즘 그 말을 자주 생각해, 잊어, 도저히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하미영은 그런 이야기를 한 끝에 한참 침묵하더니 생각을 분명하게 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 P147

생명안전공원이 인근 부동산 가격을 하락시키는 혐오시설인 납골당이 아닌, 도시를 이롭게 하는 시설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공원으로 우리 도시가 명품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했다고.
명품 도시.
그 말을 발음한 전후에 그는 울었을 거라고 하미영은 말했다.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어.
용서할 수가 없어. - P174

양갈보, 양색시.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안나를고립시키고 무시하고 경멸한 그들과, 그들의 언어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생각해. 안나를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과 말이야. 그는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둔 거야. - P177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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