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지. 나는 내 살림 해야지. 너 하는 게 살림이냐. 살림 아니면,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게 그게 무슨 살림이냐. 내 집에서 나 사는 게 살림이지. 내 살림도 바쁜데 내가어떻게 엄마 살림을 해요. 그러니까 한시라도 바삐 들어와 배우라고 나 죽기 전에. 왜 자꾸 죽는다 그래. 내가 이러고 오년을 더 사냐 십년을 더 사냐. 못됐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야 못됐다고 하냐 엄마한테. 말을 못되게 하니까. 이년이. - P20
오래전에 네 아버지하고 여기 온 적 있었다고 이순일이말했다. 버스를 타고, 그때는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차창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가 이는 길을 몇시간이고 왔다고, 지금처럼 여기로 편하게 올라오는 길도 없어서 능선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서 마침내 묘에 다다랐는데, 절할 때 보니 네 아버지가 저만큼 떨어져서 뒷짐을 진 채 굳이 돌아서 있더라, 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기서 뭘 하느냐고 이리 와서 절 올리라고말했더니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고 잡소리를 하기에 너무 당혹스럽고 열받아 그걸 말이라고하느냐고, 얼른 절 올리라고 역정을 냈는데 그걸 듣고도뒷짐 지고 서 있더라며 그뒤로 야속하고 징그러워 같이오자고 하지 않았다고, 네 아버지와 동행한 것은 그것딱 한번으로 그쳤다고 이순일은 말했다. - P27
당신은 위대하다. 한세진은 그 메시지를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그다음엔 미간에 살짝 뿔이 돋는 듯한 느낌으로 화가 났고, 그게 뭐였는지, 왜 그것이 모욕감과 닮았는지, 자기가 왜 그런 걸 느꼈는지를 나중에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한만수는 그것을 영어로 들었을 텐데 그래서인지 말투가 좀 영어였지. 홀을 쥔 왕이 그것을 하사하듯 그 애는 엄마에게 그렇기 말했지. - P34
돈이 사라졌다는 당혹감보다는 시치미를 떼는 동생들이 괘씸해 한영진은 분노했다. 하지만 이제 봐라, 아버지가 판단할 것이다, 그가 도둑을 밝혀내 망신을 주고벌을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동생들을 노려보고있을 때 한중언이 말했다. 너희 중에 누군가는 더러운거짓말을 하고 있어. 너희 중에 누군가. 라고 한중언은 말했으나 그 말을 하면서 그는 한영진을보고 있었다. - P55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려보는 것. 말하고 싶고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바뀐 것 아니냐고 다른 사람의 아기가 아니냐고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P73
내가 몇시에 퇴근하는 엄마는 부엌에 불을 켜두고 나를기다렸어. 다른 식구들이 다 자고 있어도 엄마는 자지않았지. 매일 늦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금방 지은 밥하고 새로 끓인 국으로 밥상을 차려줬어.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 P81
엄청난 사물의 밀도 때문에 누구도이순일의 방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순일은 그것에 만족했다. 미로의 끝인 침대에 누우면 커튼을 달지않은 창으로 하늘이 보였다. 이순일은 그 자리에서 혼자였고 편안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자주 뭔가를 잃어버렸다. 좋은 것이 생기면 나중에 잘 쓰려고 거기 어딘가에 넣어두곤 했는데 둔 곳을 종종 잊었다. 내가 너무 잘두는 바람에, 그럴 때마다 그렇게 말했고 그 좋은 것을끝내 찾아내지 못해도 크게 상심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진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잊은 것일 뿐, 거기 다 있을 테니까. - P111
누가 오지 않는다. 궤짝에 담긴 조기 한뭇에 소금을 뿌리거나 하며 이순일은 생각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누가 안 와. - P119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 P138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 P142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내 아버지는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고 말했는데. - P146
그 두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그 말을 들었을 땐 기막혀 화만 났는데 요즘 그 말을 자주 생각해, 잊어, 도저히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하미영은 그런 이야기를 한 끝에 한참 침묵하더니 생각을 분명하게 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 P147
생명안전공원이 인근 부동산 가격을 하락시키는 혐오시설인 납골당이 아닌, 도시를 이롭게 하는 시설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공원으로 우리 도시가 명품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했다고. 명품 도시. 그 말을 발음한 전후에 그는 울었을 거라고 하미영은 말했다.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어. 용서할 수가 없어. - P174
양갈보, 양색시.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안나를고립시키고 무시하고 경멸한 그들과, 그들의 언어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생각해. 안나를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과 말이야. 그는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둔 거야. - P177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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