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가 거듭될수록 우리가 함께 겪었던 시절에 대한 소회나 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마지막 편지에는 "상실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소중함도 있어. 네가 그래"라고 어디서 베껴 온 건지 뭔지 모를 말까지 써놔서, 얘가 술 먹고 편지를 쓴 게 분명하다 싶다가도 괜히감동 같은 것까지 받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보급용 편지지에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재희에게"로 시작하는 답장을 꾹꾹 눌러쓰기까지 했다. - P19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45
재희니까. 재희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둘만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전적으로 우리 둘만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라도. - P53
그렇게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P90
나의 뒷모습해가 뜰 때쯤 그와 나는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그의 집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집 옆 건물 상가에는 세탁소가 있었다. 이른 아침 세탁소가 열려 있을 때면 그는 내두 발자국 뒤에서 걸었고, 닫혀 있을 때면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걸었다.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게 좋아 일부러 집에서 일찍 나설 때도 있었다. 그렇게 큰길까지 나간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첫차가 올 때까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내가 버스에 오를 때면 그가 내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그가 계속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꾸벅꾸벅 조는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버스가 코너를 돌아 완벽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내 뒷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완벽히 없어져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내게 손을 흔드는 그. - P119
나는 그를 잡지 못했다. 대신 그가 문을 나섰을 때 곧장 베란다로달려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그의 뒷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그 모습이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서. 그가 완벽히 사라질 때까지, 하나의 점이 되어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그의 모습을 내 눈에 담았다.
그날의 엄마는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그게 엄마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사실은 내내 내게 묻고 싶은말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만 할 게 있지 않냐고, 당장이라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삽관돼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게 누구건 무슨 내용이건 이유 없이 패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다 똑같은 사랑이다, 아름다운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변질되어 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뭘? - 정말 미안한데,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동안 울 시간은 충분했다. 종이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물 내리기를 반복한 나는 숨을 고른 뒤 빈 가방을 다시 둘러맸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정말이지 일사천리로 나는 사회로 반환되었고, 내게 닥친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했지. 독창적 별명 짓기. 카일리 미노그를 듣다 꼬여버린 인생이라 카일리라고지은 건 아니고, 그냥 이름이 예뻐서. 어차피 이것이랑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 할 판인데 나 듣기에 제일 예쁜 이름을 붙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카일리 - P193
규호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 ㅡ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살다 보면 별일 다 있는데. — 그래도…… 왜 웃으면서 말해, 슬프게, - 울어도 내가 울어야지. 왜 네가 우냐. 그렇게 한참 동안 우는 규호를 바라보았던 나. 우니까되게 못생겼다. 못생겼는데 귀엽다. 귀여운데 가엾다. 내가 얘를 가여워하는 게 웃기기는 하지만, 규호가 콧물을삼키며 말을 했다. — 있잖아, 내가 고양이를 엄청 좋아해. 근데 못 길러. 알러지가 있거든. -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데. 너, 뚱뚱하고 못된 고양이같이 생겼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뚱고라고 부를게. 카일리만큼이나, 독창적이지 못한 별명이네, 그치만좋아.
우리가 같은 집에서 잠들었던 마지막 밤, 나는 먼저 잠든 규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죽은 듯이 자는 규호, 너는 왜 잘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걸까. 꼭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언제나 남의집에 얹혀살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내 탓일까 네 탓일까, 아니면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걸까. - P249
주택청약 당첨, 포르셰 카이엔, 첫 책 대박 나게 해주세요…… 뭔가 다 내 진짜 소원이 아닌 것 같아 빗금을 쳐서지워버렸다. 아마도 그러는 사이 구멍이 나버린 것이겠지. 나는 결국 풍등에 두 글자만을 남겼다.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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