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벨을 누르는 손가락이 절로 떨렸다
점집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박수무당이라니.
딱히 물어볼 말도 없었다. 직장에 사표는 진즉에 폼나게 던져 놓았고,
저 잘난 맛에 사는 남편은 황천길에서도 허세를 부리며 한량 짓을 할 양반이고
이런 유전자를 장착한 우리 아이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난대도
제 갈길 갈 녀석들이고.
그렇다면 난
대체 뭐하러 훤한 대낮에 이렇듯 멋대가리도 없는 낯선 문 앞에 서서 애궂은 손가락을 떨어대고 있는 지 모를 일이었다
약속 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허우대가 멀쩡한 남자 였다. 예의 티비에서나 봄직한 요사스런 행색의 늙수레한 남자가 아닌
몸매가 다부지고 눈빛이 진중한 흠..뭐랄까 동네 태권사범 같은 반듯한 사내였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도로 나갔다 올까요?
몸을 돌리다 말고 어중하게 섰다
말이 끝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용하긴 한가본 데 성질머리가 지랄맞다, 예약시간보다 십여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된소리만 듣고 쫓겨났다 는 친구 말에 예약을 잡아놓고 종일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오히려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다.
친구 말대로의 성깔이라면 삼십 분이나 일찍 왔대서 꼭 쫒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나 저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커피믹스를 탄 종이컵을 내밀며 물었다
그 성질머리 지랄맞은 무당 놈에게 그만 호기심이 동해 왔다고 말해 볼까 하다가
오가다 간판을 보고요.
누가 들어도 무난한 말을 했다
오가다였는 지, 간판이었는 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가 또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요 했다
그의 뒷꽁무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서자 벽면가득 색색깔의 휘황찬란한 동자복들이 걸려있고
산신령 처럼 보이는 벽화들이 중앙에 늘어서 있었다
물론 그 앞으로는 과일과 옛날 과자들이 박제처럼 놓여 있었다
방 한 쪽 구석에는 적당한 크기의 좌탁이 있고 그 탁자 위에는 서넛의 방울이 달린 막대와 소복히 쌀이 담긴 놏 그릇이 놓여있었다
그가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고 향을 피우고 호이호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신을 깨우고 불려내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그가 마침내 그 방울대를 요란하게 흔들며 연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왠지 그가 불러낸 신이 코트 깃을 올리며 내 몸 구석구석을 뒤지고 돌아다닐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단추를 턱밑까지 끌어 채우고 있었다
엄마, 갇혔네 갇혔어. 너무 오래도록 그러고 있어 갇힌 줄도 모르네 그지? 그래서 못 나오는 거야. 그러지 말아. 그건 그냥 둬. 엄마 몫이 아니야. 답도 없는 것을 들고 너무 오래 놀았다 그지?
종일 제 꼬리 물려드는 강아지처럼 그런다, 평생 그런다, 그러니 지금에라도 털고 나가 놀아 엄마, 여느 인간처럼 먹고 싸고 울고 웃고 탐내고 욕하고 살아. 그래야 사는 거지. 안그래? 엄마는 심심도 안해?
종이컵을 거실 탁자에 내려 놓고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었다. 내 등짝에다 오가다 또 오시란 말을 듣고 나도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가슴은 알고 있는 데 머리로 해석해서 입으로 나오지 않는 미완성의 말.
운전대를 잡고 신호등 앞에 섰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재잘대며 가는 학생들, 그 아이스크림 위로 녹아지는 햇살, 들큰한 바람. 난 심심하지 않아
2
나는 어쩌면 위로를 받고자 했는 지 모른다. 그게 여느 길가 전봇대여도 좋고 공중그네였어도 좋고 지랄맞은 동자에게서든 그게 무슨 형태의 것이든지 간에 말이다
이번엔 그 위로가 영화의 형태로 왔다
꼭 보게될 이 시점의 나를 위한 것 처럼.
딸이 고향 시골 집에서 '반복되는' 계절을 준비하며
무료함에 넌더리를 칠 즈음에, 집나간 엄마에게서 온 편지가 그것이다
정작 이런 뜻은 아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받아 먹었다
매일 원을 반복해서 그리다보면
그 원안에 갇힌 것 같지만
그 원은 이미 같은 원이 아니다
깊이가 다른 사선이다
원과 사선의 연속, 그게 바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