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댁들 같은 사람들이 뭐가 겁나 도망가요? 파리에 뭐가 있는데요?"

"다른 삶이요. 도망일 수도 있겠네요. 공허하고 희망 없는 삶으로부터의."

당신같이 멋진 사람이 적성에 안 맞는 일을 억지로 하며 이런 곳에 사는 거, 이게 비현실적인 일이야. 나도 이런 생활 싫어.

누군가 파리에서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어디든 발붙이고 사는 건 비슷하다고 이야기해 줬다면, 현실 도피용으로 떠날 경우 만날 수 있는 건 또 다른 현실일 뿐이라고 말해 줬다면 에이프릴은 덜 비참했을까.

베를린에서 돌아온 나는 미약하나마 지면을 넓혀나가며 글로 밥 벌어먹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이 일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전과 확실하게 달라진 점은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행복 같은 거, 여기에도 없다면 거기에도 없다’는 비관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든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반복될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떠나든 떠나지 않든, 어디서든 단단한 마음으로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

어쩌면 나는 이 메시지를 얻기 위해 베를린에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매일 밤 일기를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발신인과 수신인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SNS 바깥쪽에 존재하는 나의 별 볼일 없는 오늘을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이곳에서 나는 대체로 멍청하고 자주 흔들리며 할 일을 미루다 결국 후회하고 마는,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한다.

이 익명의 온라인 일기장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절대 답장하지 말 것. 둘째, 되도록 매일 매일 남길 것.

나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고민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 이미 답장을 받은 것 같기 때문이다.

숀이 말한 삶의 정수란, 에베레스트 꼭대기나 달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 그러니까 월터처럼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특별하지 않은 날들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든 순간인 것이다

역사 내에 전시 중인 지하철 사진 공모전 당선작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이리도 이른 시간에 역 구석구석을, 그것도 매일 매일 청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내 일상이 이리도 무탈하고 안온하게 흘러가는 건, 삶의 모든 곳에 존재해 이제는 당연해져 버린 일들을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된 날이기도 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 전에 실제 세상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줌파 라히리의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소재를 찾아 모험을 떠날 것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 곧 삶의 정수를 쓰고 전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당연한 일상을 지켜주던 사람들을 수시로 떠올리며 일상에서도 유의미함을 찾아낼 줄 아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어쩌면 뒤늦은 다짐을 해본다.

애매한 도움은 불만족으로 이어진다는 셀프 인테리어 선배들의 말을 떠올리며 성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왜 나는 매번 그 애가 내민 손을 내버려두었을까. 얼마간 어색함을 감수해야 다시 시작되는 관계도 있다는 걸, 왜 나는 모른 척했을까

그럼에도 이들의 다정한 침범을 기꺼이 허락하는 이유는, 즐겁고 따듯한 기억은 마치 담요처럼 안 좋은 기억을 감싸 안아준다는 걸 책방을 운영하며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폴 마르셸이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해낸 후에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처럼, 끔찍한 기억 위에 새로운 서사를 써내려 가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 입에서 더 자주 발음되어지는 내 이름. 그래서 내 것이지만 완전히 내 것은 아닌 이름.

이따금 소나 닭소리가 전부였던 세상에 내가 있음을 알려주는 건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였다.

소설가는 아니지만 에세이를 쓰는 나도 하루에 수십 번씩 거짓을 지어낸다.

글을 쓰는 일은 나 자신을 꽤 그럴듯한 인간으로 윤색하는 일이기도 해서, 에세이에 등장하는 ‘이미화’는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미화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때때로 취향은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게 만들어버리곤 하니까

어떤 일을 얼마나 어떻게 해왔든 내가 원할 때 그만둘 수 있다는 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고 했다.

통증 앞에서 무력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생생하게 신체 부위를 감각하는 사람이다.

신체는 아픈 틈을 타 발언권을 얻는다. 골반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골반이란, 척추를 통해 아래로 내려오는 체중을 다리에 전달하는 중요한 부위라고. 끊임없이 소리쳤다.

익숙해진다는 건 옆 사람의 숨소리를 시계 초침처럼 들으며 잠에 드는 것, 한밤중에 옆자리를 더듬어 안정감을 되찾는 것, 2인분의 밥을 짓는 것, 눈에 띄게 치약이 빨리 줄어드는 것, 이 모든 과정을 의식하지 않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이제 나는 안다.

"New things get old."

 

새것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나의 어린 날들을 잊어버렸다는 건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까지도 지워버린 거라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었을까.

"인생에서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려니 과거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질 않아서 어렵네요."

"떠나려는 거죠? 선택하려는 거죠?"

"처음엔 필사적이었어. 내 안의 행복했던 추억을 찾으려고. 그리고 50년이 지나서야 내가 누군가가 선택한 순간의 일부였다는 걸 알았어. 이건 정말 멋진 일이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상처에는 패턴이 없어서 매번 다른 길로 흉이 졌다

어쩌면 ‘만약’이나 ‘차라리’로 대신할 수 없는 현실의 고단함은 친구와의 대화로 얼마간 해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상처는 그 이후에 생겨났다.

오직 먹이고 입히고 재우느라 자식이 받은 상처까지 돌봐줄 여유가 없던 부모를.

그 시절에는 다 그랬다고 생각하는 편이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일까.

내 한마디에도 바로 무너져버리는 늙은 부모에게 이제 와서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고, 왜 한 번도 괜찮은지 물어봐 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으면 나는 좀 괜찮아질까

엄마를, 그리고 아빠를, 이미 나는 10년도 더 전에 용서했다는 걸 알아버렸다.

물론 언제고 <벌새>와 같은 영화를 다시 본다면 유년의 기억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마음에 박혀 기어코 또 눈물을 뽑아내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부모를 미워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존경이 ‘당신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라면, 사랑은 완벽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거라서, 단편이 아니라 삶 전체를 끌어안는 거라서, 나는 부모를 존경하는 대신 사랑하는 쪽을 택했다

어릴 적 꿈이라는 게 쉽게 불타올랐다가 곧잘 식어버리는 속성이라면, 내게 책방 주인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은은하게 지속되는 모닥불 같은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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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 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법칙 2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법칙 3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법칙 4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

법칙 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법칙 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법칙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법칙 8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

법칙 9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법칙 10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

법칙 11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법칙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어쩌면 내가 제시한 인생의 법칙이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 덕분일 수도 있고, 그런 법칙에 함축된 의미에 독자들이 끌린 덕분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냥 사람들이 그런 식의 목록을 좋아해서일 수도 있다.

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의 섬뜩한 현실을 치밀하게 기록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인간이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는 작업반장이 휘두르는 몽둥이로 한 대만 맞아도 사라질 한심한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조상은 세계를 사물들이 배열된 공간이 아니라 드라마 무대로 보았다.

나는 그 책에서 드라마적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혼돈과 질서라고 생각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나는 조심스럽고 특이한 성격이라 사람들이 내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오히려 주저하게 된다

사람들은 신념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는 믿음과 기대, 욕망 등이 서로 일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기대와 사람들 행동이 일치하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런 것들이 서로 일치해야 모두 생산적이고, 예측할 수 있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의 혼돈도 줄어든다.

목표는 주로 긍정적인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 없이는 행복해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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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마다 내비게이션이 되어준 건 영화였다.

회사를 그만둘 때, 베를린으로 떠날 때, 다시 돌아와 책방 문을 열 때도, 영화는 내게 인생에 여러 갈래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그 길엔 아스팔트 대신 자갈밭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걸어갈 수 있었던 건 나처럼 평범하고 지질한, 영화 속 등장인물들 덕분이었다.

어릴 적 여우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포기를 비웃으라고 가르치느라 정작 중요한 삶의 지혜—‘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방법—를 생략해 버렸다.

온 힘을 다해 뛰어도 여전히 나밖에 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진실하고 고유한 이야기를 영화 같다고 부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의 선택이야. 계속 가기로 했으면 그 결심을 따라야지. 두 발로 딱 버티고 제대로 살아가는 거야.

"정신 차려. 니가 왜 안 되는 줄 알아? 이거 목숨 걸고 해도 제자리도 지키기 힘들어. 근데 넌 맨날 장난처럼 하잖아. 너처럼 하면 아무것도 안 돼. 다들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너만 빼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끈덕지게 물었다. 결국 어딘가로 향하는 게 인생이라면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이고, 또 어디로 가고 싶은지.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떤 길로 걸어가든 내가 예상했던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내비게이션은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글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가 가장 입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내가 무얼 추구하는지, 무얼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경험 후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기록하면 삶의 태도에 단서가 된다는 것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내게 쓰는 일이란, 돈이 되진 않지만 거친 물살에도 무너지지 않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둑을 쌓아 올리는 일이었다.

‘언젠가 내 마음껏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세상에 내놓자. 언젠가 이해해 줄 거다, 언젠가 좋은 편집자를 만날 수 있을 거다,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을 거다,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자신의 마음속을 계속 들여다보는 일이야. 아무리 추악하고 한심해도 마주 봐야만 한다네."

"직장 다니는 동창들에게 항상 잘난 듯이 이렇게 말했어요. ‘꿈을 좇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어요.

만화가를 목표로 하는 동안은 특별하게 있을 수 있었어요. 특별한 사람으로 있고 싶었어요."

현재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꿈을 좇으며 사는 예술가로서의 우월감과 자부심에 도취되어 있던 누마타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내 이야기의 결말은 조금 다르다.

놓지 못한 꿈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작은 재능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 뚜렷한 목표 없이 벌인 일을 수습하며 사는 사람이 대다수일 테니까. .

내가 나를 마주한 채 써내려간 글이 지루하고 시시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다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다.

동시에 작은 변화가 있다면, 내게도 목표가 생겼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어제보다 더 나은 글을 쓰는 것. 그래서 이왕이면 ‘출판사와 작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중쇄’를 찍는 것

"실수를 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네가 실수를 만드는 게 아니야. 실수가 널 만들지. 실수는 널 더 똑똑하게 하고 더 강하게 하고 더 자립적으로 만들어."

"난 당신과 달라요, 해리엇. 당신처럼 담력이 세지 못하다고요."

"실패해. 어마어마하게 실패해. 실패해야 배울 수 있어. 실패해야 사는 거야. 네 인생은 시작도 안 했어."

실패가 두려워 에세이 작가라는 꿈이 있음에도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살아온 앤에게 해리엇은 말한다. 크게 자빠지라고. 기꺼이 실패하라고.

스무 살이 되도록 나를 위한 시도나 실패를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한테 물어 봐야 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에게 실패란,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문틈 사이로 아빠의 취기 어린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날이면 나는 실패한 사람이 되곤 했으므로, 아빠가 바라지 않는 일은 애초에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인생에서 맞닥뜨릴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누군가의 허락은 불필요하다는 것과 조금 무모해져도 별문제가 없다는 것.

그러니 시도하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뭘 해도 스파이라고 생각하니 두근거린다.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사는 거다.’

느려터진 거북이도 헤엄칠 때는 의외로 빠른 것처럼, 나에게도 평범하지 않은 능력이 하나쯤은 있다.

스스로가 보잘것없는 엑스트라처럼 느껴질 때, 나의 평범함이 지겨울 때, 보통명사로서의 삶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지금 평범하게 사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나는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이다’라고 주문을 왼다.

"언니, 나는 목포에서 지내면서 나 자신이 더 좋아졌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

존재 자체로 쓸모 있는 삶. 우리는 정말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을까.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냉침 밀크티 같은 사람이고 싶다. 사골처럼 고온에서 펄펄 끓여내진 않지만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우러나는 사람. 적은 말수와 차분한 어조로도 깊은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고 싶다.

행복한 감정으로만 가득하던 어린 시절이, 이제는 떠올리기만 해도 슬픈 기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슬픔이 때문에 전만큼 잘 웃지도, 장난을 치지도 않는 라일리를 보고 있자니 기쁨이는 궁금해진다. 슬픔은 꼭 필요한 걸까? 라일리를 위해서라도 슬픈 감정은 없는 편이 좋지 않을까?

우연히 깨닫게 된다. 행복한 기억 앞에는 언제나 슬픈 기억이 존재했다는 걸.

말하자면 슬픔은 공감의 감정이다.

우리는 기쁜 순간에도 함께하지만 슬픔을 공유하면서 깊어진다.

때론 나와 같은 슬픔을 겪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조금 더 견딜 만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위로에 서툰 건, 어쩌면 내가 슬픔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민이나 슬픔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대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슬픔을 공유하면 기분은 얼마간 해소될 수 있지만 상황 자체가 변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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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요즘 것들’이나 ‘꼰대’ 같은 말은 사회계층, 성별, 세대 등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 의해 확산되어 한 집단에 속하는 모든 개인들을 하나로 규정지어버리는 전형적인 예이다.

본인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사회나 사람들이 정해준 카테고리에 넣고 간편하게 정의 내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어른이 될수록 그런 용기가 ‘바보 같음’으로, 내가 잘하는 것이 ‘잘난 척’으로, 솔직한 감정이 ‘주책없음’으로 비칠까 봐 두려워졌다.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보다 자꾸만 앞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앞에서 잘 버텨주어야 인간관계에서 생긴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가장 많이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나를 지속적으로 못살게 구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타인과의 갈등 상황에서도 본인을 몰아세우고, 다 끝난 일을 붙들고 끝까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도 다름 아닌 ‘나’이다.

우리는 대화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때조차 끊임없이 누군가의 메시지를 받는다.

그 순간 그것은 대화일까, 대화가 아닐까. 연애일까, 짐작일까. 관계일까, 가짜 우정의 위안일까.

우리는 그 불빛이 나와 타인의 문을 환하게 열어주는 빛인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깜빡이는 경고등인지를 알아야 한다.

셰리 터클은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민음사, 2018)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공감을 떠나 ‘공감하는 느낌’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
우정을 떠나 ‘우정의 느낌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

상대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섣불리 짐작하고 판단하고 있다면, 내 마음도 다른 사람에게 같은 방법으로 짐작되고 판단되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어머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부 사이에 생긴 문제를 해결할 힘이 본인에게 있으니, 그것을 굳이 어린 자식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험담이 무기력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개는 ‘현실적으로 내가 뭔가를 할 수 없을 때’, ‘문제를 조율할 방법이나 에너지가 없을 때’ 또는 ‘정면 승부를 하면 오히려 내게 불이익이 올 때’ 뒷담화를 하게 된다.

반대로 내가 해결할 수 있고 주도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뒷담화를 별로 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 시간을 굳이 험담하는 데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의 대상자, 듣는 자, 그리고 말하는 사람까지’라는 탈무드의 유명한 교훈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는 험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나’가 너무 많으면 소통이 어려워지고,

‘우리’가 너무 많으면 인내와 희생이 뒤따른다.

똑똑한 ‘나’가 많이 모이면 입은 많지만 귀는 줄어들고,

‘나’보다 ‘우리’에만 매달리면 귀는 열리지만 마음속에 말 못 한 억울함이 쌓인다.

인생에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이것이 불변이라면 ‘우리’가 필요한 순간에 ‘나’를 잠시 미뤄둘 줄도 알아야 한다.

부단히 ‘나’를 지키며 살아가되, ‘우리’가 필요한 순간을 판단할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그 기준은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없다.

‘우리가 필요한 순간’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 순간에 ‘나’를 내려놓으면 잠시 고통스럽고 손해를 볼지언정, 자신의 판단하에 ‘우리’를 선택했기 때문에 적어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이것이 나를 지키고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다

어떤 것을 잘 모르는 진짜 나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아는 척하는 가짜 내가 앞서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존중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모르는 나’가 ‘아는 나’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있겠는가.

진짜 나를 찾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잘 못하는 것은 잘 못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 말을 하면 희한하게 자존감이 올라간다.

적어도 아는 척할 때만큼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늘 만나는 모든 낯선 것들에게 좀 뻔뻔하게 말해본다.
"나 그거 잘 몰라."

하차하고 승차하기를 반복할 수 있는 힘, 하차한 뒤에 다시 승차할 기회를 기다리는 힘, 승차했어도 언제든지 하차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색깔에 가까이 가는 힘이었다. 그게 그녀만의 ‘멋짐’이었다.

어떤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도 온다. 때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어디쯤에서 멈춰야 한다.

들어가려 했다가 돌아서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실패’, ‘끈기 부족’, ‘후회’ 같은 부정적인 말을 갖다 붙인다. 그래서 종종 그만해야 할 때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인내심 강하고 끈기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끝까지 자신을 괴롭힌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열차에 타고 있다. 그런데 하차가 두려워 거기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으면 계속 같은 풍경만 보게 된다. 생각만 해도 지루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 풍경을 자기 인생이나 색깔로 굳게 믿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다가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때가 오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경험을 시작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김숙처럼 가볍게 말하는 거다.
"저 이만 하차할게요."
다시 새로운 열차에 승차해서 새로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방법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자신이 매일 하는 일에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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