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요즘 것들’이나 ‘꼰대’ 같은 말은 사회계층, 성별, 세대 등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 의해 확산되어 한 집단에 속하는 모든 개인들을 하나로 규정지어버리는 전형적인 예이다.

본인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사회나 사람들이 정해준 카테고리에 넣고 간편하게 정의 내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어른이 될수록 그런 용기가 ‘바보 같음’으로, 내가 잘하는 것이 ‘잘난 척’으로, 솔직한 감정이 ‘주책없음’으로 비칠까 봐 두려워졌다.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보다 자꾸만 앞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앞에서 잘 버텨주어야 인간관계에서 생긴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가장 많이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나를 지속적으로 못살게 구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타인과의 갈등 상황에서도 본인을 몰아세우고, 다 끝난 일을 붙들고 끝까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도 다름 아닌 ‘나’이다.

우리는 대화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때조차 끊임없이 누군가의 메시지를 받는다.

그 순간 그것은 대화일까, 대화가 아닐까. 연애일까, 짐작일까. 관계일까, 가짜 우정의 위안일까.

우리는 그 불빛이 나와 타인의 문을 환하게 열어주는 빛인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깜빡이는 경고등인지를 알아야 한다.

셰리 터클은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민음사, 2018)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공감을 떠나 ‘공감하는 느낌’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
우정을 떠나 ‘우정의 느낌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

상대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섣불리 짐작하고 판단하고 있다면, 내 마음도 다른 사람에게 같은 방법으로 짐작되고 판단되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어머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부 사이에 생긴 문제를 해결할 힘이 본인에게 있으니, 그것을 굳이 어린 자식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험담이 무기력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개는 ‘현실적으로 내가 뭔가를 할 수 없을 때’, ‘문제를 조율할 방법이나 에너지가 없을 때’ 또는 ‘정면 승부를 하면 오히려 내게 불이익이 올 때’ 뒷담화를 하게 된다.

반대로 내가 해결할 수 있고 주도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뒷담화를 별로 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 시간을 굳이 험담하는 데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의 대상자, 듣는 자, 그리고 말하는 사람까지’라는 탈무드의 유명한 교훈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는 험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나’가 너무 많으면 소통이 어려워지고,

‘우리’가 너무 많으면 인내와 희생이 뒤따른다.

똑똑한 ‘나’가 많이 모이면 입은 많지만 귀는 줄어들고,

‘나’보다 ‘우리’에만 매달리면 귀는 열리지만 마음속에 말 못 한 억울함이 쌓인다.

인생에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이것이 불변이라면 ‘우리’가 필요한 순간에 ‘나’를 잠시 미뤄둘 줄도 알아야 한다.

부단히 ‘나’를 지키며 살아가되, ‘우리’가 필요한 순간을 판단할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그 기준은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없다.

‘우리가 필요한 순간’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 순간에 ‘나’를 내려놓으면 잠시 고통스럽고 손해를 볼지언정, 자신의 판단하에 ‘우리’를 선택했기 때문에 적어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이것이 나를 지키고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다

어떤 것을 잘 모르는 진짜 나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아는 척하는 가짜 내가 앞서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존중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모르는 나’가 ‘아는 나’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있겠는가.

진짜 나를 찾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잘 못하는 것은 잘 못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 말을 하면 희한하게 자존감이 올라간다.

적어도 아는 척할 때만큼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늘 만나는 모든 낯선 것들에게 좀 뻔뻔하게 말해본다.
"나 그거 잘 몰라."

하차하고 승차하기를 반복할 수 있는 힘, 하차한 뒤에 다시 승차할 기회를 기다리는 힘, 승차했어도 언제든지 하차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색깔에 가까이 가는 힘이었다. 그게 그녀만의 ‘멋짐’이었다.

어떤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도 온다. 때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어디쯤에서 멈춰야 한다.

들어가려 했다가 돌아서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실패’, ‘끈기 부족’, ‘후회’ 같은 부정적인 말을 갖다 붙인다. 그래서 종종 그만해야 할 때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인내심 강하고 끈기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끝까지 자신을 괴롭힌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열차에 타고 있다. 그런데 하차가 두려워 거기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으면 계속 같은 풍경만 보게 된다. 생각만 해도 지루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 풍경을 자기 인생이나 색깔로 굳게 믿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다가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때가 오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경험을 시작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김숙처럼 가볍게 말하는 거다.
"저 이만 하차할게요."
다시 새로운 열차에 승차해서 새로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방법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자신이 매일 하는 일에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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