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쩐지 이게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다.’고 은근히 강요하는 것 같다

당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호주 작가 브로니 웨어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라는 책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따져 보자. 젊어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확신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또 그렇게 살다가 망하지 말라는 법 있나? 그러면 브로니 웨어가 책임져 주려나?

젊을 때의 나와, 늙을 때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고, 그때 원한 것을 지금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모두 어떤 시점에서 자기에게는 최선이라 생각하고 선택하려 애쓰지 않는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뼈아프게 알아차리는 순간은 어쩌면 죽기 직전일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대부분, 죽기 직전의 뇌 상태는 섬망, 우울, 환상에 빠지게 되니 그마저도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

그런데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 "운명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직장 생활 2년 후에는 아주 불행해졌다고 한다.

의대 들어와 삼십여 년, ‘이 일은 내 일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떨쳐버렸던 적 없이 항상 의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어쩌면 결혼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빨리 결혼했고 아이도 빨리 낳았지만, 젊은 시절의 그런 내 선택을 후회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문제는 이제 다시 돌아가도 "네가 원하는 것이 그럼 뭔데?"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거다.

나의 장례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은 내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나란 존재는 떠나고 이제는 썩거나 불태워질 내 육체만 남은 것이니, 나는 내 장례식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는 셈이다.

다만 살아남은 내 자식들을 위해 장례식 비용을 미리 마련한다든지, 혹은 믿을 만한 공제회에 가입한다든지 하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나란 존재는 떠나고 이제는 썩거나 불태워질 내 육체만 남은 것이니, 나는 내 장례식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는 셈이다.

늙어서 그래도 남는 것은 친구라고들 말한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심심하고 무섭기도 하니 그 말이 맞긴 하다.

친구들과 수다 떨면서 자식, 배우자,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버릴 때도 많다.

친구들과 수다 떨면서 자식, 배우자,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버릴 때도 많다.

혼자 고립되어 긴긴 시간, 무료하게 지내는 것보다 누군가와 우정을 나누며 일을 함께 하며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준다는 일은 참 고맙고 소중한 일이다.

특히 혈기 왕성해서 골프다, 해외여행이다, 계모임이다 하면서 몰려다녔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죽거나 자리에 눕고 나면 점점 줄어드는 친구들의 숫자를 세면서 속상해하다 그냥 모임을 그만하자고 제안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친구를 노후 대비 따위의 자원으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에겐 어차피 미래가 없다."라는 심정으로 지금 가능한 관계를 즐기고 나누면 될 일이다.

노후 준비라 해서 친구에게 괜히 집착하고 정 주다 배신당하는 경우를 임상에서 한두 번 만난 게 아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를 성취한 사람들에게 갖는 찬탄의 마음과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다. 죽음의 과정이 힘들기 때문에, 모든 죽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 존경받고 혹시 잘못한 것이 있어도 용서받아도 될 것 같다.

우리가 언제 그들처럼 죽어 보았는가? 경험하지 못했다면, 경험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자.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시시하게 연명의료법 같은 것 말고, 더이상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똥오줌 싸고, 엉뚱한 욕설이나 입에 담아 내가 내 몸뚱아리를 주체하지 못할 때, 본인이 원하면 안락사를 해달라는 요구를 미리 해놓고 조용히 삶을 맞이할 수 있는 법안을 누군가 발의해서 처리해주길

셰익스피어는 "당신은 자연, 혹은 신에게 죽음이라는 빚을 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 자연이 혹은 신이 내게 삶을 주었으니, 죽음 역시 그들이 내게 베푸는 은덕일 것이다.

삶이 고달프긴 했지만 알고 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이었듯이, 죽음 역시 끔찍하게 무섭고 고통스럽지만 겪고 나니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이 아니라는 법도 없다.

혹은 죽기 전에 무언가 빚을 갚고 가야 한다는 뜻일까. 의신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를 갚으라."고 한 소크라테스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했던 걸까.

"겁쟁이들은 죽기 전에 죽을 준비를 못해서 죽는 시늉만 하면서 여러 번 제대로 죽지도 못한다

다만 원하는 것은 남편보다 일찍 죽는 것. 남편보다 늦게 죽어 아들, 며느리 눈치 보면서 훼방꾼 되지 않으려 괜히 고고한 척하지 않을 수 있길. 남편보다 일찍 죽어 남편이 내 장례 잘 치러주길. 남편보다 일찍 죽어 "마누라가 없으니 너무 아쉽네." 하고 그가 아내를 그리워하길.

오랫동안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하다가 비슷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복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짧은 시간이라도 함께 하다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자식들 다 키우고 난 뒤 서로 주름진 얼굴, 구부정한 허리를 토닥거리면서 함께 늙다가 비슷한 시간에 죽는 것은 행운이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자연 그 자체란 느낌이 든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극복하고, 함께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정. 그게 진짜 부부의 정이 아닐까 싶다.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뜨거운 사랑만 사랑이라 생각 말고, 자연을 닮아 더 겸손하고 더 평범하고 더 심심하게 살다가, 무애 무덕하게 손 붙잡고 죽을 수 있는 미지근한 사랑에 대한 희망도 가져 보시길. 어쩌면 그게 유일한 결혼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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