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될 때 그렇다. 나를 멈추게 하는 상황은 무수히 많다.
"불안은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의 시그널이자 잘 살고 있다는 증거"
언제나 불쑥 나타나는 불안이나 두려움을 더 이상 정색하며 대하지 않는다. ‘어, 또 왔어?’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진다.
이제 밤을 새워 헤매더라도 내가 하기로 한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원하는 것을 당장 하지 못할 때 실망하고 실패했다고 낙담하기 쉽다. 하지만 그 마음까지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서성이더라도 기어코 써야 한다. 썼다 지울지라도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내 글의 목적, 내 삶의 비전은 누구도 아니고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이니까
새로운 일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고 일상이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유한한 삶 속에서도 오늘이라는 시간이 리필되니 다시 그 길 위에서 힘을 내 볼 일이다.
밤을 새워 헤매는 것처럼 느낄지라도 이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옳은 길이 될 테니까
당신이 자기가치감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남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애결하게 된다. - 브레네 브라운, 《나는 불완전한 나를 사랑한다》 중에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은 사람을 만났다. 피기도 전에 필 수 없다고 말하며 스스로 지고 만 사람
몸보다 마음이 늙어 생기를 잃어갈 때는 정신을 쪼아대며 자책하는 일을 그만두고, 몸을 움직이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피기도 전에 필 수 없다고 스스로 지지 말아야 할 이유다.
체력은 실망을 견뎌내는 인내심, 결단력, 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희망이란 단어로 이어졌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있었다
피곤해서 바라는 일을 거절하지 못 하게, 편견이 몸의 갈망에 시큰둥하지 못하게 몸을 움직여 보자.
겹겹이 가둔 그곳에서 한 발만 나와 보자. 스스로를 가둔 마음속 감옥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자
마음을 지치게 하는 너저분한 생각을 ‘완료형의 행동’으로 지워 가다 보면 그 자리에 새살이 차오르듯 새 생각이 기분 좋게 들어온다.
몸보다 마음이 늙어 생기를 잃어갈 때는 정신을 쪼아대며 자책하는 일을 그만두고, 몸을 움직이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피기도 전에 필 수 없다고 스스로 지지 말아야 할 이유다.
마음이 불구덩이 같을 때는 일단 그 자리에서 피하기로 했다. 서로 화를 주고받다 보면 뜨거운 말에 마음이 다치게 마련이니
한 사람을 길러 내는 일은 내 안의 알을 몇 번이나 깨고 나오는 과정과도 같다.
무엇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배우려고 하는 것일까?
생은 이렇듯 삶의 마디마다 떠오르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인 것 같다.
화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이거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대상에게 옮겨진다고 한다.
나도 아이도 후자일 거라고 생각하며 "화는 보살핌을 간절히 바라는 아기"라는 틱낫한의 말도 마음에 새겨 본다.
이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 나는 체력을 키워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일들 외에 온전한 내 삶을 마련하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오래 하기 위해 달렸더니 달리기가 점점 좋아진다.
내가 나를 위해 성실해지는 시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에 때때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매일 같은 곳을 달리다 보면 그제야 알게 된다. 하루하루가 다르고 매 시간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이처럼 나는 달리면서 매일의 나에게 여백을 마련해 준다.
나의 온전함을 위해 달리면서 내가 나에게 감동하는 것, 이 또한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같은 장소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고 다른 깊이로 느껴 보는 경험은 무엇인가를 오래 응시했을 때 비틀어 보는 일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햇살 아래서 찍은 그림자가 햇살에 다정한 모습으로만 보이기 쉽듯, 상대를 보면서도 그가 있는 자리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섣불리 선망하고, 성급하게 매료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세히 오래 보면 보인다. 성과가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님을.
우리는 많은 노력과 열정의 합으로 우뚝 솟은 그 일부만 볼 뿐이다.
그가 견뎌 온 이면의 시간을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정성을 들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달리는 나를 진정으로 응원한다. 이런 마음이 솟아나는 지금도 좋기에.
내가 가진 것, 소유한 것, 누리는 것이 나의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고 해석한 그 세계가 나 자신이며 나의 존재인 것이다.
내 소유가 아닌 삶이 나의 세계라니···. 이대로 내가 존재했고 죽을 수도 있다니···. 삶에 발목 잡혀 옴짝달싹 못 한 듯 무력함을 느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죽을 만큼 힘든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나를 아무 때나 가져다 쓰려고 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래도 되는 존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다짐 때문이었을까? 한 번도 와 닿지 않던 단어들이 내 삶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삶에서 자기 결정권을 가진 사람으로 건강하게 자립하고 싶다.’
멍청한 타인에 혹사당하지 않기 위해서(사실 이 부분이 몹시 통쾌하다. ‘멍청한 타인’이라니.)는 아니지만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꾸준하게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은 새벽에 달리면 무섭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나를 잃고 나를 놓치고 사는 것이 더 무섭고 두렵다. 빈틈없이 나로 존재하는 유일한 이 시간이 소중하다.
하루는 친구가 책을 읽어도 달라지는 점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달라지면 좋겠는지 물었다. 친구는 모르겠다고 했다.
달라지고 싶고 개선하고 싶은 목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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