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내뱉고 싶어 글로 쓰기 시작했다.

방구석에 앉아 원망과 한탄을 쏟으며 소중한 날들을 낭비하면서 중년을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단전에 힘을 주고, 노트북을 두드렸다. 나를 향해서만 굳게 닫힌 줄 알았던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머릿속을 헝클어뜨리던 생각들이 한 편, 한 편 글로 태어났다.

가슴에서 꺼내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보니 생각보다 별게 아니었다.

나를 다독이기 위해 쓴 글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다. 많은 사람의 공감과 ‘좋아요’가 모였다. 크고 작은 응원이 더해져 결국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됐다.

이 책에는 내 예민함이 만든 너절한 흑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이불킥을 부르는 부끄러운 과거를 책에 쓰며 깨달았다. 편집하고 싶은 인생의 NG 컷들이 모여 오늘의 내가 됐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서툴고 예민한 내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지나간 날들에 대한 후회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향한 다짐도 담았다.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닮은 누군가를 향한 위로와 응원도 아낌없이 넣었다.

부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당신의 어지러운 현재와 흐릿한 미래가 조금 더 선명해지길 빈다. 책을 쓰는 동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서른이든 마흔이든, 우린 누군가에게 여전히 꼬꼬마일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할 필요도, 실패했다고 속단할 필요도 없다. 우린 아직 살아갈 날들이 훨씬 많다.

엄마 말대로라면 20대보다, 30대보다 훨씬 괜찮은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앞날이 불투명한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불안할 때마다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곱씹는다.

다 때가 있다. 사람마다 다 때가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자

애초에 완벽한 글이란 있을 수 없다. 수십 번 고치고 다듬어도 다시 보면 또 흠결이 보인다.

이불킥 방지를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매만져 보지만 예상치 못한 구멍들이 늘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좋아하는 일이면 오래 해. 오래 하면 너 욕하던 놈들은 다 사라지고 너만 남아."

대박을 터뜨리는 한 개의 글보다, 소박이든 중박이든 누군가의 가슴에 닿을 글을 자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계속 쓴다. 오늘도 쓴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목표 지점과 방향을 분명히 해 내가 가야 할 길로 또박또박 걸어가는 마음으로 쓴다.

얕은 글이라도, 오그라드는 글이라도, 부족한 글이라도. 그럼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조금 더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 지치지 않고, 그저 내 속도대로 간다.

사람의 인생도 수국처럼 각기 다른 색깔로 피어난다.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 해도,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더라도 사람마다 목적을 이뤄 가는 과정도, 결과도 다르다.

우리는 결코 똑같은 색깔의 꽃을 피워 낼 수 없다. 그러니 비교할 필요도 없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수국처럼 오롯이 나만의 색깔을 담은 꽃을 피우는 때가 언젠가 올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조급함으로 가득 찬 나를 다독인다

‘이건 무서워서 싫고, 저건 지루해서 싫고. 뭐야?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가볍게 마음을 먹으니 발을 떼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내 성격에 주저주저하다가는 평생 발을 못 뗄 게 뻔했다. 크게 호흡을 몰아쉬고 단번에 발을 뗐다. 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때부터 뭐든 묵직한 의미를 두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던 일들을 그만뒀다. 대신 ‘뭐, 아니면 말고’ 라는 전제를 붙여 가볍게 시도했다.

얼굴에 평온한 기운이 자리 잡은 비결은 단순하다.

인생이라는 시소를 타는 것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

때로는 올라갈 수도, 때로는 내려갈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일이 기다려지고, 그 내일을 시작할 아침을 빨리 맞이하기 위해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됐다.

걱정과 고민으로 까만 밤을 알알이 채우던 오랜 불면의 밤이 그렇게 끝났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고 깨닫지 않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절로 얻을 수 없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이 응당 얻어야 할 삶의 경험을 내 선에서 자르고 빼앗는 일은 이제 하지 않는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더 줘야 마음이 편하다는 착각을 깼다. 내 안에서 ‘No 쇤네 선언’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확실히 편해졌다.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하지도 않았고 불만이 쌓일 틈도 없었다.

원래 세상은 내가 주는 만큼 돌려받는 정직하고 공평한 곳이 아니다.

내 딴에는 좋은 의도로 건넨 말도 누가 듣느냐, 어떤 상황에서 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를 좋게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내가 명동 한복판을 걷다가 브레이크 댄스를 춰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며 이해한다. 반면 똑같은 행동을 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얘가 미쳤나?’ 하며 눈살을 찌푸리면서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그렇게 언제든, 누구에게든 난 돌아이 혹은 미친 사람이 될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마인드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없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서 보니 악역의 존재 이유에 대해 절실히 깨달았다. 누가 악한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결과였다. 결과가 좋으면 그게 선이고, 결과가 나쁘면 그게 악이다.

이제는 악역을 맡게 된다고 해도 피하거나 숨지 않는다. 기꺼이 독이 든 성배를 마신다.

악역도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역할이고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들이 있어야 조직이 무리 없이 돌아가고 유지된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악인은 쓴소리를 내뱉고 조직원을 몰아치는 사람이 아니다. 진짜 악인은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남의 노력에 숟가락을 얹고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다.

많은 상처와 실패를 안고 나서야 알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걸. 그리고 이해는 어렵지만, 인정은 쉽다는 걸. 그 후부터는 ‘왜?’라는 물음표 대신 ‘그럴 수 있어!’라는 인정의 느낌표로 사람들을 대했다.

세상에는 나와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이해하고 바꾸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재빨리 인정하고, 아낀 에너지를 오롯이 나에게 쓰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다.

왜 저렇게 생각하지? 왜 저렇게 말을 하지? 왜 저렇게 행동하지? 분노와 의문이 몽글몽글 피어날 때 M의 말을 떠올린다. 이해 대신 인정.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재빨리 생각의 방향을 바꾼다.

"그래! 그럴 수 있어. 나와는 다르지만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어."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팥빙수를 뒤섞은 후배는 단지 팥빙수를 섞어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뿐, 그 누구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팥빙수를 먹는 방식의 차이였지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은 실수일 수 있고 두 번째는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세 번 똑같은 결론이 난다면 답은 하나다. 그건 그 사람의 본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

세 번은 결코 실수일 수도, 우연일 수도 없다.

세상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도 아니고, 피한다고 피해지는 존재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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