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신념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는 믿음과 기대, 욕망 등이 서로 일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기대와 사람들 행동이 일치하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런 것들이 서로 일치해야 모두 생산적이고, 예측할 수 있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의 혼돈도 줄어든다.
우리는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 없이는 행복해지기 어렵다.
나아지고 있다는 개념에는 어떤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삶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인간은 나약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자, 그 사실을 잘 아는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재한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 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즉 심원한 가치 체계에 내재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희망을 잃고 절망적인 허무주의의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우리가 올바르게 산다면, 부담스러운 자의식의 무게를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르게 산다면,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원망으로 시작해서 시샘과 복수심과 파괴적 욕망을 차례로 자극하는 피해 의식에도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올바르게 산다면, 우리가 불완전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전체주의적 이념에 의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올바르게 산다면, 지옥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바다 밑바닥에 사는 바닷가재 두 마리가 같은 시각에 같은 영역을 차지하고 같은 곳에서 살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 바닷가재 수백 마리가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고 좁은 곳에서 얼마 안 되는 부스러기를 두고 다퉈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굴뚝새와 바닷가재에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다른 많은 동물처럼 지위와 영역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영역권과 사회적 지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역은 간혹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암, 당뇨, 심장 질환 같은 비전염성 질병에도 취약하다. 부자는 가벼운 감기로 끝나지만, 빈곤층 노동자는 폐렴으로 죽는다
마크 트웨인 말처럼 "우리가 뭘 몰라서 곤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알고 있다면 곤경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착각 때문에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자연은 선택하는 행위자이지만 정적인 행위자는 아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음악이 자연을 모방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종에 유리한 환경이 바뀌면, 원래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던 특성도 달라진다.
따라서 자연 선택설은 생명체들이 자연이 설정한 특정한 목표에 자신을 정밀하게 맞추어 간다는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체들이 자연과 함께 춤을 춘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세로토닌 수치가 낮다는 것은 자신감이 없다는 뜻이고, 스트레스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뜻이다
때때로 뇌의 계산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수면과 식사가 불규칙할 때 계산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불확실한 상황을 만나면 계산기가 혼란에 빠진다.
몸은 무수히 많은 부분이 연결되어 있어서 완벽하게 준비된 오케스트라처럼 유기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모든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제때 제대로 해내야 한다.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적인 행위는 자동화되어야 한다.
안정되고 신뢰할 만한 습관으로 자리 잡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일상적인 행위에서 복잡성이 줄어들어 단순해지고 예측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현상은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식사와 수면을 일정한 시간에 하는 아이는 즐겁고 신나게 행동하지만, 수면과 식사 시간이 들쑥날쑥한 아이는 불평하고 짜증 내는 경우가 잦다.
질서 속에도 혼돈이 있고, 혼돈 속에도 혼돈이 있다.
가장 강력한 질서는 가장 변하지 않는 질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나무가 보이지 않고, 나무를 보고 있으면 숲이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항상 실재하지만 전혀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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