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기도 한 말을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게 비극의 시작이다.
타인의 말을 판단하는 냉철함의 100분의 1만 발휘해 내 말을 판단할 수 있다면 말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말과 말은 입장과 ‘다른 입장’이, 지식과 ‘다른 지식’이, 지혜와 ‘다른 지혜’가 만나는 일이다.
무의식이 무의식을, 역사가 역사를, 환경이 환경을 대하는 일이다. 그리고 경험과 경험이 만나는 행위이다
비슷한 말을 해도 다르게 들리는 것은 말한 사람의 경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통해 그 사람이 생각하고 고민한 것들, 그 나름의 깨달음과 통찰이 감동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내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내 말은 모두 그것들의 결과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통찰에서 나온 ‘나의 말’보다는 유명한 말, 검증된 말, 쓰인 말, 인정받는 말을 더 선호한다.
그렇게 자신의 말을 잃어버린 채 ‘주워들은 말’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의 말’을 잃은 채 살다 보면,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살게 된다.
나의 것이 훨씬 더 값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의 것을 추종한다.
이렇듯 ‘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말을 잃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 말이 없는 사람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자기 언어로 말하는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다.
자신의 경험과 그것에서 얻은 지혜로 말하기 때문에 진실하다.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믿고 말하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존중할 줄 안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있어 실수를 하더라도 인정과 사과가 빠르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말을 하며 살아왔을까?
‘좋아하는 일’이 열등감으로 바뀌는 것은 참 쉬운 일이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제롬 프랭크는 "모든 정신장애는 기가 죽어서 생기는 병이다"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좋아하지 못하는 것도 기가 죽어서였다.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만한, 또는 인정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그냥 두었다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세상에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만의 무엇’으로 빛나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끝내 ‘나만의 글쓰기’를 열등감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살리에리가 자신의 노력과 열정만 보느라 천재성에 가려진 모차르트의 노력과 열정은 보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타인의 성과나 성공에 대해 한쪽 눈을 감아버린다.
돈을 모으기 위한 감춰진 노력들,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에 수반되는 고통과 비용, 지독하게 공부하느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 1등을 지키기 위한 인내의 시간. 타인의 노력과 열정은 나에게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초라해질 자신을 위해 만들어놓은 ‘방패의 말’들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괴로움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나를 보호하려고 만든 방패의 말들은 험담이나 뒷담화, 악성 댓글로 변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나는 왜 이것밖에 못 할까?’ ‘나는 왜 항상 이럴까?’
남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살리에리 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습관처럼 다른 사람의 인생을 깎아내리며 자신을 부정하는 괴로움 속을 헤맬 것이다.
거기서 해방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른 사람도 나처럼 작은 것 하나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인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대개 한쪽 편을 들지 않고 가운데를 지켰다. 여기에도 내 나름의 선은 있었다.
그게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지독한 솔로몬병이었다.
"옳음과 친절 중 하나를 선택할 땐 친절함을 선택해라."
"스누피,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지?"라는 질문에 스누피는 뭐라고 말했을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찰리 브라운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찰리는 말했다. "오, 그거 멋진 조언인걸."
나의 상처나 굴욕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자극받을 때, 그때가 나에겐 위기 상황이다.
먼저 "뭐 그런 말에 상처를 받느냐"는 충고나 위로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상처는 보편화될 수 없는 고유한 내 감정이니까.
내가 어떤 말에 상처받고 있다고 이해를 구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기에도 버거우니까.
다만 알려야 한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단호하게, 우아하게, 유머러스하게 한 방 먹이라고. 하지만 그런 잽도 순발력이 있어야 ‘그 순간에’ 나간다.
나 같은 느림보들은 괜히 부작용만 만들기 십상이다. 감당 못 하고 버벅대다가 끝날 확률 100퍼센트. 그럼 어떻게 알릴까? 화를 내기에는 애매한데 상처받는 말을 들었다면 ‘순간 침묵’으로 그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게 상책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과 애리조나대학의 공동 연구진은 143명이 이틀 동안 쓴 말을 녹음해 분석한 결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이 적게 받는 사람보다 ‘굉장히’나 ‘정말’, ‘엄청나게’ 같은 단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고 밝혔다.
이 단어들은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부사어인데, 기분이나 감정이 한층 고양된 상태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또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은 ‘그들’ 같은 3인칭 대명사를 1인칭 대명사(나)보다 덜 사용하는데 이는 외부 세계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대상은 나 자신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을 열심히 하되 지배되지 말고 자유롭게 놓여나 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안에 있는 좋은 말들이 밖으로 나올 숨구멍도 생긴다.
잊지 말자. 쉬지 않으면 나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타인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말이 계속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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