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마다 소통의 기준은 있어도 지역 차이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이탈리아의 천재 라이더 발렌티노 롯시(Valentino Rossi, 모터사이클 선수 _옮긴이 주)의 열렬한 팬이라 모터사이클 경주에 관련한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어디 사람인지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롯시의 웃는 얼굴이나 뛰어난 라이딩에 모두 ‘좋아요!’를 주고받으면서 행복하다는 기본자세가 같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소통의 기준(영상, 짧은 글, 해시태그로 자기를 표현하고 공감해주는 사람과 연결된다.
마음을 울리는 글과 영상에는 ‘좋아요!’로 응원을 보낸다)은 국가를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이런 SNS 소통 기준이 타인과의 연결 방법의 규범이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스타그램은 대다수가 호의적이었는데" 하고 말했더니 "트위터는 그런 매체니까요"라며 같이 있던 젊은이들이 인정하듯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이들이 ‘도쿄는 그런 곳’이라며 서로 고개를 끄덕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말의 감성을 연구하지만, 이럴 때 ‘말’이라는 존재가 지닌 태생적 한계를 생각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진실된 마음과 동떨어지는 상황이 종종 나타난다.
말이 주체인 정보매체는 언제나 이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여기 내가 쓴 문장에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독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책을 쓰면서 그 괴리감과 괴로움을 잊지 않으려 한다.
트위터를 아끼는 사람은 틀림없이 내가 손 들어준 인스타그램이 껄끄럽다고 생각할 하단 것이다.
남녀의 뇌가 다르다는 내용에 대해 논하면 다르지 않다고 믿는 사람 쪽이, 저녁에 일찍 잠들기를 추천하면 늦게 잠드는 사람 쪽이 거북해진다.
모든 책에는 글쓴이의 세계관이 담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나와 세계관이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는다면 틀린 생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사람들의 소통이 똑같은 양상을 띠게 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사리 깨닫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 정서를 갖는다고는 할 수 없다.
대다수의 사람이 고른 정답이 어떤 사람에게는 오답일 수 있다.
‘뇌가 인식하는 경향’이 다르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애초에 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인지할 수가 없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입은 옷의 단추를 꿰맨 실 색깔까지 신경 쓰인다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즉시 인지하기’란 어림없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려야 하는 역을 놓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뇌는 천성적인 자질과 경험에 따라 ‘순간적으로 인지하는 것’을 선택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사용하는 ‘인지의 짜임새’(감지하는 요소의 조합)를 인식프레임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식프레임을 때와 장소에 맞춰 적절하게 사용한다.
바다를 바라봐도 산을 바라봐도 사람마다 감동 포인트가 다르다.
인식프레임이 발동하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배경에 불과하다.
‘하늘과 산의 경계선조차도 아름답다’ ‘새로 돋아난 잎의 녹음이 맑다’는 등의 느낌이 비로소 풍경이 되어 생각과 겹쳐져 정경(情景)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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