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시간 안 걸리고 도깨비방망이 한 번 뚝딱 휘둘러 이루어지는 일이 어디 있을까.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그 드라마도 결론이 나려면 12회나 15회까지 봐야 하고 즐겨 하는 스마트폰 게임도 끝판왕을 만나려면 몇백 게임은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유독 투자는 내가 하자마자 수익이 나야 하냐고.
초보자가 무술을 배우기 위해 고수를 찾아간다. 하지만 사부님은 청소나 밥 짓기, 빨래만 시키고 무술은 안 가르쳐준다.
처음에야 성실하게 하지만 결국 참다못한 제자는 불평을 터뜨린다. "사부님, 제가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그러면 사부님은 "이놈아, 우선 하라는 일이나 잘해!"라고 호통치며 사라진다.
여기서부터가 무림 고수가 될지 말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점이다.
이때 때려치우고 산을 내려가면 무급 노동만 하다 끝나는 셈이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사부님 수련하는 모습도 엿보며 묵묵히 일하다 보면 어느새 무술을 배우기에 딱 좋은 몸과 마음이 되어 있다.
이때 사부님은 드디어 무술을 가르쳐준다.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냐고 불평을 터트리는 제자에게 사부님이 하고 싶은 말은 사실 "먼저 인간이 되어라"였을 것이다.
하지만 보아 하니 인간이 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위인도 아닌 거다. 그러니 하라는 일이나 잘하라고 호통친 거지.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오겠거니 하면서.
부자가 되는 것은 곧 인간이 되어가는 길이라는 거다.
자기 수양이 안 돼 있으면 부자가 되기 힘들다.
기다리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때로는 좌절이 와도 꿋꿋하게 버텨나가고,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잘 맞추며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나와 주변 상황을 잘 매만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긴 시간 힘든 투자를 견디며 돈을 불려나갈 수 있다.
나는 성장을 안 하면서 내 돈만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러다 망한 사례를 들려주면서 욕심내지 말라는 조언을 하면 대부분은 "에이, 전 욕심 안 내요", "전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라고 한다.
언니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투자를 딱 하는 순간 다른 인격의 사람이 등장한다.
투자로 인한 소득은 절대로 불로소득이 아니다.
그것은 정직한 노동의 대가이고 노력을 기울인 만큼만 되돌아오는 착한 소득이다.
그 투자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발품도 팔아야 하고 정보도 찾고 결단도 내려야 한다.
여기에 인내도 필요하다. 그냥 직장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직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내 돈을 잃는다. 이것이 노동이 아닐 리 없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그때부터 욕심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그렇다면 묻고 싶을 것이다. "언니, 그럼 어디서부터가 욕심이에요?" 내 생각이 욕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원하는 수익만큼의 리스크를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다. +100을 원하면 -100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욕심이다.
따라서 수익률 10퍼센트를 바라는데 리스크는 0퍼센트여야 한다는 건 욕심이지만, 수익률 30퍼센트를 바라고 리스크도 -30퍼센트까지 감당할 수 있다면 욕심이 아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익을 보면 더 큰 이익을 보고 싶고 손해를 보면 만회하고 싶어서 무리를 한다.
더 많이 벌고 싶은 것도 욕심이고 더 빨리 벌고 싶은 것도 욕심이다.
당장 다음 달이면 두 손에 수익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식 투자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왜 수익이 안 나냐고 초조해한다. 사부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
사부님이 처음부터 무술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리도 스스로를 돌아보자. 과연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돈을 불리고 지킬 체력은 잘 길러놓았는지 말이다
투자는 기가 막히는 정보를 알아내서 수익을 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보를 판단하고 선택해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행동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는 담대함도 갖춰야 한다.
자신만의 요리 레시피 하나쯤은 있을 것 등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삶에는 철학과 소신이 있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
‘아름다운 삶에 대한 기준이 있는 소신 있는 부자’가 되어보자
소신이 없으니 이리저리 휘둘리고 끈기 있게 해나가질 못한다.
이 사람 말 들으면 이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 들으면 저 사람 말이 옳은 것 같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체하면서 "양쪽 다 일리가 있어" 혹은 "둘 다 잘못이 있네"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왠지 공정한 것 같고 편하기도 해서 양시론이나 양비론을 펼치지만 실은 소신 부족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신을 가질 수 있냐고? 내 머리로 생각을 하면 된다.
부자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걱정 안 하고 살고 싶다면 내가 일하지 않아도 내 돈이 나를 위해서 돈을 벌어오는 시스템을 가진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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