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러 가면서 가슴 설레고 두근거리는 사람도 좋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말을 왜 했을까 혹은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어 하며 후회되거나 찝찝한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나의 서툰 감정 표현이나 혹여 넘쳤을지 모를 과장된 수다에도 아무런 오해나 갈등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다
어차피 백 년이 지나면 아무도 없어 너도, 나도 그 사람도
- 에쿠니 가오리. 제비꽃 설탕 절임. 일본: 新潮社, 2002, 무제
미움은 나중에 누가 끝까지 살아남느냐의
삶의 양이 기준이 되고
사랑은 지금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느냐의
삶의 질이 기준이 된다
힘내라는 말보다는 ‘먹고 힘내.’라는 문구가 적힌
치킨 기프티콘을 보내 주는 것.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을 하는 것보다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몇 시간이 걸린다 해도
다 들어줄게.’라고 건네는 것.
위로는 상대방에게
내가 가진 시간이라든가 돈이라든가
뭔가 현실적인 것을 내어줄 때 더 힘이 되기도 한다.
줄 수 있는 게 마음뿐이라 미안한 게 진심이고,
마음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랑이든 위로든 뭐든 더 구체적이고 확연하게
행동으로 표현해 줄 때 힘이 난다 느끼기에.
내 시간과 돈을 기꺼이 내준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은 마음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렇게 나는 종종 기프티콘 샵에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마음을 고른다.
집을 정신없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임을
미니멀 라이프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혼자 살았을 때도 불가능했던 미니멀 라이프이니,
지금의 미니멀 라이프를 하찮게 치부하지 말고
감사하게 여기기를요.
"실은 저는 혼자 살 때
엉망진창으로 해놓고 지냈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없어서 이리 사는 게 아니라
미니멀 라이프 덕분에 이리 겨우 사는 거랍니다."
라는 말을요.
고로, 아이가 없으니 가능한 미니멀 라이프는
내게 너무나 과분한 칭찬이자 오해입니다.
공간을 방해할 어느 누가 없음에도 불가능했던 일상을,
미니멀 라이프로 얻은 운 좋은 사람이니까요
가격표 먼저 슬쩍 봐야 안심하는 버릇에서 탈피하는 것.
배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수강료 때문에 엄두조차 못 내지 않는 것.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대할 때
소극적이고 수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것에서
벗어나는 것.
적극적으로 공격적이고 거리낌 없이
온전히 즐기며 살 수 있는 것.
사람들 눈에 모르는 게 많은 바보로 보일지라도,
마음에 느껴지는 삶의 빛나는 요소가 많다면,
바보라는 말을 들어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치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음식은
집으로의 무사 귀환을 의미하니까.
나와 가까운 곳에 사는 누군가
오늘 저녁 치킨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나도 그들처럼 집에 잘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대인관계에 서툰 나란 사람에게
다정하고, 세심하고, 진득하고, 배려 깊음을 보여준
대부분의 이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홍차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옷은 많지만 입을 게 없다는 질환에 걸리면 옷이 있음에도 자꾸만 사고, 샀지만 어쩐지 그래도 입을 게 없다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증상은 점점 악화 일로를 향합니다
먹어본 자가 맛을 안다는 맛있는 녀석들의 슬로건에
나는 적지 않은 용기를 얻는다.
울어본 자가 눈물 닦을 줄도 알고
넘어져 본 자가 일어설 줄도 알고
실패해 본 자가 성공의 달콤함도 알 거라고 말해 본다.
아울러 먹어본 자가 맛을 아는 것처럼
경험해 보지도 않고 직접 보지도 않은 것을
아는 척하는 알량한 교만만큼은 버리겠노라고.
먹어본 자가 맛을 안다!
고로 뭐든 몸으로 직접 도전해 본 자가 결과를 안다!
노안.
어쩌면 내 몸의 나이 듦이 알려주는 겸손함 같다.
가까운 것이 희미해진 게 아니라
먼 것이 또렷해진다고 말이다
어찌 보면 가격이나 조건 따위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자신의 취향대로 삶의 리듬을 유지하는
남편의 천성이 부럽기도 하다
혹여 갈 길 멀다 해도
그저 꾸준히 실하게 기록하는 게
유일하면서 최선의 답이라 느꼈다
결혼이든 사랑이든
내게는 환상보다는 모두 현실에 가까운 존재 같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와 그가 함께 하는 현실에서
매 순간 마주하는 일상이 로맨스라고
인생 어차피 혼자이니
위로나 격려 따위 필요 없다는 식이 아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위로 한마디에도
슬픔이 희석되는 기적을 나는 믿는다.
그렇지만 때로는 내 슬픔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에는
예상치 못한 오류도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도 누군가의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믿음 아래
당사자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측근들에게 말한 적이 적지 않을 사람이다.
그게 당사자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노출이었을 것을
내가 겪어 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아
뒤늦게라도 용서를 구해본다.
내게만 쉽지 않은 심정으로 말했을 누군가의 슬픔을
단체 카톡방에
"누구누구가 이렇게 슬프대요.
그러니 우리 모두 함께 위로해 줍시다."라고
당사자가 절대 원치 않을 슬픔 홍보를
해 준 적이 있었을 나였기에
타인의 슬픔도 타인이 컨트롤하는
그만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내게 털어 놓는다면 진심으로 위로하고,
내게 털어 놓지 않는다고 해도
나와 슬픔을 나누지 않으려 한다고 섭섭하게 느낄 것이 아니라그저 묵묵히 위로하고 응원하기를
인생은 사소한 것에서 비극이 시작되고,
하찮은 것을 귀히 여길 때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난다.
사소한 것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말고,
하찮은 행복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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