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양쪽의 극지처럼, 우리는 반대편에서 서로를 본다.
함께 살 수 없는 북극곰과 남극펭귄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산다. 모두 알다시피 이를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북극곰과 펭귄이 서로 몰라도 될 것들을 모르는 채로 살았더라면 서로 이렇게까지 미워하게 되었을까?’
예전에는 내 의견이 타인에게 전달되려면 시간이 걸렸고 그것은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감정이라는 오염물을 걸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격렬한 감정에 휘둘려 펜을 쥐더라도 한 문장씩 적다 보면 가라앉고는 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가장 생생한, 그래서 가장 유해한 감정이 즉각 표현된다. 표현(expression)이라는 것이 감정을 밖으로(ex-) 발행하는(press) 속달(express) 서비스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증오하는 사람을, 반작용적으로 증오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로 더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안별로 의견을 달리 갖기보다는 함께 싸워줄 이들과 보조를 맞추게 될 것이다.
이견을 제시할 때 품으면 생산적 내부 비판자가 될 수도 있지만, 변절자 혹은 배신자로 낙인찍고 적대시하면 정말 그것밖에는 될 것이 없다.
존재의 정처(定處)가 없이는 불안한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다.
누구든 박수쳐 주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 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기 때문에 서게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형성된 근본 입장은 안 그래 보이지만, 작은 입장이 생겨나는 과정을 보면 그렇기도 하다.
가까운 이와 논쟁하다 보면, 별 확신 없이 택한 내 입장을 상대방이 지지하지 않을 때, 상대를 이기는 게 목적이 되기 시작하면서 내 입장도 걷잡을 수 없이 강화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깨닫는 것이다. 나의 ‘옳음’보다 너의 ‘있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네가 없는 나의 옳음이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 우리는 문득 얼마나 유연해지는가.
<프랑켄슈타인>에서도 피조물은 원래 괴물이 아니었다. 버려지는 순간 괴물이 되었을 뿐.
우리는 서로 몰라도 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준다.
그렇게 매일 서로를 버리고, 매일 누군가로 탄생시킨다.
여기저기 자유롭게 서성이며 만났다 헤어졌다 할 수 있는 독립적 개인 말고, 양극에서만 서식할 수 있는 괴물을, 괴물 집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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