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가 초래한 우울한 사회상의 한 단면
마음의 여유가 바닥나자 연골 없는 무릎처럼 조그만 외부 자극에도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타인의 우호적 행동조차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적대적 귀인 편향’에 사로잡히게 된 셈이다
정치의 기본은 갈등의 조정과 해소에 있기때문이다
출세욕과 인정 욕망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이런 정치꾼일수록 자신의 무지와 이기심은 전혀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다
사실 국민의 삶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나랏일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이념도 좋고 집권도 좋지만 국회 안에서 게임하고 막말이나 하고 있을 거면 애당초 정치에 발을 담그지 말아야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전대미문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 자신부터 뾰족한 가시는 잠시 가려두고 사회적 신뢰와 연대를 지켜내는 데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대화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할 때 비로소 가능하며,
그렇게 사회적 합의를 이뤄나가야 정치꾼과 독설가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욕하면서 닮아간다고, 이런 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받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나
나만 외롭고 나만 스트레스받는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 모두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말 한마디라도 가려서 하자.
세 치 혀와 열 손가락이 말과 글로 바뀌는 순간 비수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욱하는 감정이 나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분노가 내게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마음속에 작은 문 하나쯤은 열어두고 살자.
그렇게 서로를 믿고 함께 나아가는 게 고슴도치 사회의 늪에 빠지지 않는 길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맞서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는 길이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이다.
여우가 온갖 교활한 꾀를 부려도 고슴도치의 한 가지 확실한 호신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이다.
고슴도치는 위험에 처했을 때 몸을 웅크리고 온몸의 가시털을 잔뜩 세워 자신을 방어하므로 살아남는 데는 여우를 능가한다는 것이다.
아르킬로코스는 스스로를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그 하나 덕에 명성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영국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저서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아르킬로코스의 말을 빌려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고슴도치형이다.
하나의 중심적 가치를 지향한다. 자칫 맹목적이기 쉽다. 성급한 일원론자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 여우형이다.
하나의 비전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쓰지 않는다. 신중한 다원론자다.
벌린은 이러한 이분법이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세상을 관찰하고 비교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고 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남보다 큰 발언권을 지닌 이들은 대부분 고슴도치형이다.
하나의 비전에 몰입한다. 상황이 바뀌어도 그것을 고수한다.
수많은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을 하나의 비전에 꿰맞추어 해석하려 드니 정확도가 떨어지고 무리수가 따른다.
이런 고슴도치들이 고함을 내지르니 여우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고슴도치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한 심성만으로는 비전을 구현해낼 수 없다. 이 세계에서는 임기응변과 능청을 통해서라도 험로를 헤쳐 나갈 정치적 역량(virtue)이 필요하다
현실에서는 고슴도치의 호신법이 꾀 많은 여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나의 비전에만 의지할 경우 그게 먹혀들지 않는 상황에선 속수무책인 것이다
아무리 꾀를 부려도 앞날을 열어나가기 어려운데 하나의 비전에 매달리다간 문제의 해법을 찾기 난망하다.
고슴도치의 원대한 비전에 미혹돼 그것에 갇히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고슴도치의 비전보다는 여우의 지혜와 분별력이 더 필요한 때다.
여우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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