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어긋난 관계들을 제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순간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매 순간을 감사히 여기고,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라는 이름으로 미루고 있는 일들이 있다면, 지금 바로 시작하십시오. ‘언젠가’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미루고 있는 일들 중에서 특별히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더더욱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세요.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상처로 남지 않을 죽음을 위해서 마음껏 사랑하고, 삶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감사함으로 죽음이 아닌 이별을 준비하길 바랍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충분히 따뜻하고 빛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슬프지만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죽음,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은 죽음이 그렇습니다.

나이 오십을 넘기다 보니, 친구 부모님의 부음을 심심찮게 접합니다. 더러는 또래 친구의 안타까운 부음도 전해 듣습니다. 그때마다 죽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바쁜 일과 중에는 슬픔도 사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껏 슬퍼해야 마음껏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로 비워낸 정화된 가슴이라야 사랑이라는 싹이 단단히 뿌리를 내립니다.

<호스피스>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편안하고도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위안과 안락을 베푸는 봉사 활동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호스피스 완화병동의 아침이 오늘도 어김없이 밝았습니다. 누군가는 또 하루의 생을 얻었고,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터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은 "이제 7년 정도 일했으니 죽음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겠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병동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하나도 같은 게 없습니다. 각각의 죽음은 제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제 나름의 향기와 빛깔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죽음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이로써 죽음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되는 것이지요. 끝까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죽음이 머지않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시간입니다.

다행히 그들 곁에 호스피스라는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호스피스의 존재조차 아예 모르기도 하고, 알아도 모른 척합니다. 끝내 죽음을 부정하며 고생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만남이 수많은 우연과 필연을 거듭하면서 전생의 어느 지점과 맞닿은 연유로 해서 이어진다고 합니다.

사랑이 깊은 만큼 슬픔도 깊어져서 무력감과 공허함에 ‘나도 따라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함께하며 기억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슬픔과 고통을 공감하며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사별가족 관리를 하면서 더욱 애틋하게 깨달았습니다

떠난 가족들은 하늘의 별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우리가 닿는 시선 어디든 머물러 있습니다. 땅의 꽃이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되어, 우리가 내쉬는 숨결 하나에도 존재하고 있을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곁에 죽음이 있고, 죽음의 곁에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가치 있게 보내도록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죽음은 인간이 태어나서 필연적으로 겪는 인생의 과정입니다. 죽음은 연습할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앞날이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이 다가올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덜어 쓰는 삶의 유한성을 아는 만큼,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겸허하고 편안해야 할 것입니다

‘웰빙well-being을 통한 웰다잉well-dying’도 중요하지만 ‘웰다잉을 위한 웰빙’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떠나는 사람이 있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남아 있는 가족들이 살아내야 할 삶도 있습니다.

부모가 없는 삶, 배우자가 없는 삶, 자식이 없는 삶, 형제자매가 사라진 삶. 그 삶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상실의 삶이 잘 치유되려면 떠나보내는 죽음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아야 합니다. 가족 간의 화해와 용서가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불의의 사고나 예기치 못한 급작스런 죽음에 비해,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죽음은 다행히 예견된다는 점에서 준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나마 상처가 덜하지 않을까 싶지만, 죽음이라는 과정은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설명을 들어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준비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닙니다.

임종 징후가 보여주는 각종 지표나 수치를 통해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이성적으로는 느끼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설마 설마’ 하는 것이 가족의 마음입니다. 심전도 기계가 ‘0’이라는 숫자를 가리켜도 말이지요.

"난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해도 실제로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죽음의 언저리에 있으면서도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만큼 아직은 살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떠나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 모두에게 ‘슬픔’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다만 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슬픔의 색깔과 깊이는 서로 다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사람에게도, 떠나보내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상처로 남지 않을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 비통함을 인정하는 것 같은 생각에 울지 못했다고 합니다.

‘냉정해지자. 지금까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면, 이제는 잘 갈 수 있도록 보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졌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삶의 나이>라는 시가 떠오르는 밤이었습니다. ‘일 년 뒤 오늘, 삶의 나이를 한 살 더해서 전해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예쁜 편지지에 시를 곱게 옮겨보았습니다. 이제 추억이 될 그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을 기억하며.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맞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내 삶의 일부입니다. 수많은 죽음을 보는 것 역시 내 삶의 일부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는 많은 죽음과 함께하면 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유일하게 면역이 생기지 않는 것이 사별의 슬픔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위로가 어제보다 더 어렵고, 오늘의 눈물이 어제보다 더 뜨거운 것을, 매일 하루씩의 삶을 더해가며 더 크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있었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그는 더없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었던, 그래서 그때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사별의 애통함과 슬픔은 경험해보지 못한 힘든 감정이라는 뜻이겠지요.

나는 27세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보내드리고, 30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말기암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사고로 한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일이 얼마나 잔인하고 충격적인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사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기억합니다. 또한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충격, 투병 과정의 고통과 위기 상황들, 암세포와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말기 판정, 시한부 삶…. 그리고 안녕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지요. 아니,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가 오히려 상처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요. 그래서 지금 환자 가족들의 "선생님은 모를 거예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과 준비된 죽음을 경험하며, 삶 속에 사별의 슬픔을 녹여내어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간호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살아지더라"는 사별가족들. 아마도 사랑의 기억이 가슴 깊이 남아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별 상실을 인지하고 애도하는 시간이 충분하더라도 ‘직면’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직면은 사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기에 피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별 상실의 과정 중 한 부분일 뿐이고, 직면을 해야만 ‘건강한 애도과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절차나 확인 없이도 조용한 직면도 있고, 긴 시간 동안 미루어진 직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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