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모두 자살 동기를 털어 놓았다. 그것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 즉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두 사람에게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과학자였던 그 사람은 책을 써 왔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사람의 아이, 그 아이에게 애정을 베푸는 데 있어서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 낼 수 있다.

나는 단순한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여섯 번째 겨울을 맞았지만 지금 유럽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 처지는 그렇게 최악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 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등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공정하게 얘기해서 미래가 가망 없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모두 생각을 같이했다. 우리 수용소에는 아직 발진 티푸스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살아남을 확률을 스무 명 중 한 명으로 점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바로 한 시간 후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미래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미래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한 과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져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 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내 동료(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가 가끔 한숨을 쉬던)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느님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 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 알기를 바란다고.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의 희생에 대해서 얘기했다. 희생은 어떤 경우에나 다 의미가 있다. 우리의 희생은 그 특성상 정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혹은 물질적인 성공이 중요한 세계에서는 틀림없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 희생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희생에는 의미가 있었다.

나는 진솔하게 말했다. 우리 중에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동료가 하늘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런 종말로부터 구원받도록 해 달라는 기도였다.

이런 사람에게 고난과 죽음은 의미 있는 것이다. 그의 희생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닌 희생이다. 그는 헛되게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가망이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 삶이 갖고 있는 충만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이 말을 했다.

나는 어느 날 감독이 은밀히 불러 빵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 배급받은 빵을 아껴 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나를 눈물로 감동시킨, 빵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나에게 인간적인 ‘그 무엇’도 함께 주었다. 그것은 따뜻한 말과 눈길이었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됐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에게 더 이상 정신적 치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전과 똑같은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내가 앞에서 수용소에 있는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용기를 주려면 그가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얘기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삶이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고, ‘사람’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정작 자유를 얻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어떤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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