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칼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수년간 동물을 먹지도 쓰지도 입지도 않으며 동물이 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왜 학살이 아닙니까. 이것은 왜 범죄가 아닙니까. 이것은 왜 언어가 아니고 이것은 왜 저항이 아닙니까. 90년대생 이 활동가들은 이전 세대 인간들이 노동자, 여성, 장애인, 빈민, 홈리스 등을 넣었던 자리에 동물들을 넣었다.

김향기는 말했다.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를 택할 수 있었다면 도살장을 택했을 것입니다. 진짜 피해자들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합법은 누군가에겐 사형선고와 같아서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돼지가 다음 공정으로 무참히 굴러떨어진다. 머리에 총을 맞고 주저앉은 소의 핏발 선 눈을 꼼짝없이 바라보며 우리는 판사의 목소리를 듣는다.

영상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인간의 법정으로 돌아왔다. 죽인 자들이 피해자의 자리에 있고 죽음을 막은 자들이 가해자의 자리에 있는 그런 법정이었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진짜 피해자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동물들의 눈빛과 목소리는 환영처럼 사라졌다

[이충걸의 세시반] 나, 태어나서 좋았어


나는 늘 매일이 생일이라고 우겼다. "날 생(生) 날 일(日). 죽지 않고 눈뜨는 모든 날이 생일이야."

어른도 아이들로부터 생일의 힌트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 애들은 생일이 돌아왔다는 것을 기뻐하고, 계속 자라는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니까. 그런데 아이들처럼 생일 촛불을 끄고, (물질로 표현되는) 마음의 선물에 정신 못 차리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며 산다고 믿지만, 삶은 거꾸로 뒤돌아가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생일의 야비한 모순이다.

[기고] 위안부 문제, 이제 법원이 답할 차례다 / 양성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현재 16명이고, 평균 연령은 93세에 이른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들은 현재의 외교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국제 연대 및 국가기구를 통한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가해국인 일본 법원에서도 소송 등의 노력을 다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마지막 변론기일에 나와 "이제 믿을 곳이 오로지 법밖에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 법에 절박한 마음으로 호소한다"며 이번 재판이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고 피해 회복을 위한 마지막 수단임을 강조했다.

[조기현의 ‘몫’] 위험을 혼자 감수하는 습관

"왜 짐을 혼자 짊어져요!? 같이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다쳐요." 며칠 전, 작업실 이사를 하며 짐을 옮기다 이삿짐 업자에게 혼났다.

혼자 일하다가 죽지 않을 권리가 ‘운’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은 너무 비겁하다. 나의 몸에 깊게 새겨진 안전불감증은 이 비겁한 세상의 증상일 것이다. 한해 2400명,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여전히 위험을 홀로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

[창] ‘문샷’보단 ‘룬샷’ 하자


바칼은 이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룬샷(Loonshot)’과 이를 수용하는 ‘구조’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룬샷이란 다들 무시하고 홀대하는 소위 미친 아이디어를 말한다. 역사를 바꿔 온 아이디어는 자세히 뜯어보면 룬샷인 경우가 많다. 

관료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산업 현장에서 새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면 규제를 논한다. 기존 규제의 틀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공격받으면 더하다. 택시업계와 대립하다 규제 철퇴를 맞은 ‘타다’가 대표적이다. 사업 다 망한 다음에 규제 풀겠다고 나서는 건 소용이 없다. 아마 ‘한국형 뉴딜’과 같은 ‘문샷’(Moonshot·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것처럼 중요한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야심찬 목표)에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정부에 감히 말해 본다. 이제는 룬샷하자.

[살며 사랑하며] ‘아나바다’의 시간

배승민 의사·교수


온 세계가 새로운 시대의 생존법을 배워가며 버티는 이 초유의 시기에 하나씩 물건들을 정리하며 문득 생각하게 된다. 인생이란 것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물건을 다루는 것도 결국은 잘 떠나보내는 걸 배워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렇게 또 하나, 아쉽더라도 소중한 추억이 남도록 잘 사용한 뒤 적당한 때에 잘 보내는 것을 배운다.

한국일보-참된 행복, 마이너스 행복법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어느 한의사분께서 쓰신 ‘마이너스 건강법‘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지난 시절은 건강을 위해 영양가 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야 하는 ‘플러스 건강법 시대‘였지만 비만이나 음식물 쓰레기가 큰 문제일 정도로 먹거리가 풍부해진 지금은 건강을 위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자제하고 멀리해야 하는 ‘마이너스 건강법 시대‘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건강을 위해서는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멀리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특히나 근래에는 대형 농장이나 공장 등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먹거리들이 많다 보니 이 과정에서 농약이나 화학비료 그리고 인공 사료 등을 사용해서 생산된 식재료들, 또한 지나치게 가공되거나 화학첨가물들이 들어가는 식품들을 너무나 쉽게 접하기 때문에 평소 이러한 음식을 자제하지 못한 채 건강에 좋다는 음식을 챙겨 봤자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분 말에 의하면 이것은 마치 쓰레기 더미 위에 임시로 흙을 덮고 꽃을 심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몸의 건강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도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라서

오은 시인


얼마 전 박희병이 쓴 <엄마의 마지막 말들>(창비, 2020)을 읽었다. 술술 읽혔는데, 이상하게 페이지마다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1년여 동안 어머니의 보호자이자 관찰자, 기록자였던 저자가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당신의 말들을 모아 낸 책이다. 호스피스 병동을 전전하는 일, 어머니를 위해 도토리묵과 손두부를 먹여드리는 일을 읽노라면 삶과 죽음의 존엄성에 대해, 사랑의 방식과 죽음의 방식에 대해 헤아리게 된다.

어머니의 한두 마디 말은 대체로 이런 극한 상황에서 이따금 나온 것이었으므로 얼핏 전후 맥락이 없고 의미 없는 말처럼 보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이 말들이 모두 의미가 없는 말들은 아니며 단지 의미가 해독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관계가 말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독서를 할 때 몰랐던 세계에 발 담그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자신의 경험을 겹쳐 읽으면 또 하나의 눈이 생긴다

몸부림을 치며 하시던 "집에 가자"라는 말씀에 "한 밤만 자고요"라고 답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책감이 든다. 이처럼 사람의 말일 때는 예사로운 것이 ‘그 사람의 말’이 될 때는 특별해진다.

오늘은 각별한 두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데 달인이니까." 비행기를 태워준 기분이 들어 "오늘 내 생일이야?"라고 물었더니 "매일 생일 하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살아 있는 한, 매일이 생일이다. 난 날은 다 달라도 우리는 모두 오늘을 산다. 오늘도 기억할 말들이 모다기모다기 쌓여간다. 연말이 되면 그 말들을 가져다 가슴속에 모닥불을 피워야겠다.

기고 옷 짓는 것이 위기를 창조의 발판으로

칙칙하고 어두운 색은 그들의 근검을 뜻한다. 목의 깃과 소매로 살짝 보이는 흰색의 셔츠는 그들의 위생과 인간관계의 의리, 진실성을 상징한다.
우리가 슈트라고 부르는 옷이 400년 전 그들에 의해 한 나라의 복장으로 공인되었던 것이다. 찰스 2세의 양복을 공인한다는 칙령은 복장으로서 국민의 정신을 통합하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살며 생각하며]

아직도 가야 할 먼 길 있다



내게 매력적이었던 말 ‘블루’는 코로나19로 산산이 깨졌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니. ‘블루’는 이제 일상 언어다. 연말의 들뜬 기분은 간곳없다. 송년 약속들은 하나같이 취소된다. 감염에 대한 잠재적 위험으로 주위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 바이러스 하나가 일상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음을 실감한다. 불량국가 중국의 허접한 세균 관리 탓이다.

코로나 공포 속에 올 한 해도 저물고 있다. 해가 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성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시대에 뒤떨어지고 또 무언가 중요한 걸 하나씩 잃어버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눈은 침침해지고, 호기롭게 대여섯 잔을 사양 않던 폭탄주는 한두 잔에 손사래를 친다. 아이들은 성큼성큼 크고 세상의 아버지들은 스스로 늙어 간다. 세월이 헛헛하게 흐르고, 사내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스스로 산타가 된다

[안진용 기자의 엔터 톡]

흥미롭지만 불편한 ‘돈자랑’


IMF 시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는 대한민국이 망하는 데 베팅해 큰돈을 번 이들이 "대한민국 망했어, 우리 부자야!"라고 좋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주인공은 그의 뺨을 때리며 "내 앞에서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마"라고 일갈하는데요. 그 성공이 누군가의 한숨과 무덤 위에 일군 전리품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전제가 사라지면


부지런히 채비를 마치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며 집을 나서던 것이 이제는 선잠을 간신히 깨며 노트북의 파워를 누르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수업 중에도 손들고 질문하는 것보다 채팅창에 의견을 적는 것으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다시보기로 되풀이하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아마도 학생들은 등록금을 낮춰달라 이야기할 것입니다. 학교가 자랑하는 멋진 건물을 이용하지도, 그 안의 서비스를 원하지도 않기에 순전히 강의에 해당하는 비용은 적합할지 모르지만 과외의 비용에 대해서라면 지불할 의향이 없다고 할 터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원격이라면 굳이 한국의 학교에 수강신청을 할 이유가 없다고 하지 않을까요? 특정 분야에 더 우수한 외국의 학교에 등록하여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이렇듯 물리적으로 이동하여야 한다는 전제가 사라지는 순간, 방법과 효율이 다른 방향으로 극대화하기 시작합니다.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바뀌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며 카페 안에서 취식이 금지되자 그곳에서 공부를 하거나 이동하며 업무를 처리하는 분들에게서 머물 곳이 마땅치 않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카페는 커피나 디저트를 파는 곳의 역할 뿐 아니라 디지털 노마드들에겐 도시 안의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준 셈입니다. 반대로 이 현상은 우리 사회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적었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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