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변화했는가?"

이 책은 지금까지 출간된 『심연』 『수련』 『정적』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이다. 이 네 권의 책은 ‘위대한 개인’이 되기 위한 4단계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인간이 심연-수련-정적을 거쳐 승화의 단계에 이르면, 새가 알에서 지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듯, 나비가 애벌레의 습관을 유기하듯 이전의 상태에서 탈출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영원히 머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색안경도 시간이 지나면 유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알면 알수록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는 우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경외뿐이라고 말한다.

승화는 과학에서 말하는 화학 변화처럼 고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를 거치지 않고 기체로 변하는 한순간의 도약이 아니다. 승화는 어제와 달라질 오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이자, 지속적으로 자신을 혁신하려는 용기 있는 도전이다.

내가 발견해야 할 별은 도달할 수 없는 저 먼 하늘에 있지 않다. 그 별은 스스로 두 발을 묶어 좌정하고 눈을 감으면 비로소 보이는 원석이기 때문이다. 그 원석은 지금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내일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당신은 어떤 유언을 남기고 싶은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제12권은 그의 유언장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면서 제1~11권의 내용 중 중요한 삶의 철학을 제12권에 다시 한 번 실었다. 제12권은 나머지 책들과 달리 주위 환경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한 삶의 회고다.

아우렐리우스는 58세의 나이로 로마 제국의 최전선에서 인생을 마친다. 그는 일주일 정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5막인 줄 알았건만 3막으로 종료되는 허무한 연극일 수도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우리가 세상에 올 때도 내 의도가 아니라 연출자의 의도대로 온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그 연출자의 의도대로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할까? 나는 오늘 옳은 것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가? 나는 옳은 것을 가려내고 진실한 말을 생각해낼 수 있는가?

병든 몸이 다시 건강을 찾기 위해서는 몸을 구성하는 개별 세포들을 치료해야 한다. 문명과 사회가 썩었다면, 유일한 희망이자 치료는 개인일 수밖에 없다. 개별 치료가 공동체 전체 치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지극히 사적이며 개인적이다. 개인만이 국가를 변혁시키는 유일한 통로이며 힘이다.
 

모든 것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신을 찾고 있다. 칼 융의 말처럼 오래된 신을 대치할 새로운 신을 찾기 위한 경계에 서 있다. 새로운 신이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칙과 상징이다.

역경이란 내가 상상하고 준비한 환경이 아니라, 순진한 의도와 노력이 비참하게 무산되는 의외다.

지혜로운 자에게 역경은 기회다. 그는 그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예상한다. 그는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진정한 노력을 통해 자신도 놀랄 만한 인간으로 승화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가을에 열매가 풍성하게 맺혔다고 기뻐하면, 그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춥고 배고픈 겨울이 찾아온다. 그 겨울이 온전히 지나가면 서서히 새싹이 돋아나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여름에도 땀 흘리며 노력하게 만든다. 자연은 그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가을의 풍성한 수확으로 보상한다. 사계절의 순환은 고통이라는 신비가 만들어내는 순리이자 섭리다.

고통은 생명의 존재 방식이다. 고통이라는 관문을 거치지 않은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 고통은 외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동력이자 기반이다. 동물로 태어난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가 고통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그리스어로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즉 ‘도시 안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사는 동물’이라고 명명했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인간을 ‘호모 파수스(Homo passus)’, 즉 ‘고통을 감수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고 싶다. 인류는 고통을 통해 자연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은 당장의 고통에 반응한다. 동물은 배가 고프거나 다쳤을 때, 신음한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상상하는 ‘연민’과 미래에 다가올 고통을 상상하는 ‘안목’을 통해 생존해왔다. 연민과 안목은 인류의 정신적인 유전자이자, 인간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조각가의 정과 망치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없음’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유일한 동물이다.

고통은 나도 알지 못했던 실력을 발휘할 기회다. 우리 자신을 개조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고통과 아픔이라는 잔인하지만 필수불가결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가 지른 불길 속에서 스스로를 태워 재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겪는 지금의 이 고통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훈련이다.

고통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진짜 ‘자신’을 일깨워 피조물로 살아온 우리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 고통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 숙고할 절호의 기회다.

양심은 그것을 소유한 자가 소중하게 여겨 갈고 닦을 때 비로소 빛을 내는 원석이다. 그 원석에서 뿜어 나오는 찬란한 빛은 어둠을 걷어내고, 우리가 헤쳐 나갈 인생이라는 미지의 바닷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양심을 모르거나 무시한다면, 그는 불행한 자다. 그는 타인이 정해놓은 규율이 유일한 법이라 믿고 그것에 쉽게 복종하며 평생을 노예로 살 것이다.

인간은 두 가지 마음으로 갈등한다. 하나는 타인에게 순응하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양심에 기꺼이 복종하려는 마음이다

시민들이여, 당신들은 자신의 양심을 포기하고 국가의 법을 따릅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왜 양심을 소유합니까? 저는 우리가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에 대한 존경을 장려하는 문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단체(국가)에겐 양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 있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국가)는 양심을 소유합니다. 법은 결코 인간을 정의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목자들의 지팡이는 철퇴가 되고 목자들은 늑대로 변질된다"고 경고한다.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는 집단주의적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집단을 장악하려는 소수는, 자신들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교리’로 교묘하게 그들을 세뇌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최상의 집단 지위를 획득한다. 그 경계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다스린다.

인간은 외딴 섬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소통하고 이익을 도모해 공동체를 만든다. 그 공동체를 하나로 엮을 문명을 구축하고 문화를 향유한다. 공동체는 여러 사람들의 모임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존재할 때 만들어지는 전체다.
 

개인이 자립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갈고 닦아 스스로 훈련하지 않는다면, 그는 늑대를 따르는 양으로 전락해 비참한 운명에 처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깨어 있는 국민 한 사람이 곧 국가다. 양심의 발견이 깨달음이며, 양심의 훈련이 교육이다. 자신만의 양심에 복종하는 행위가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양심을 경청하는 행위가 배려이자 친절이다.

경쟁은 그리스인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스트레스이자 역경이다. 그들은 동료 시민들과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초월해 신적인 자신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정이란 쓸데없는 가지들을 미리 잘라내는 용기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상상하고 준비하는 마음’이다. 그들은 이 마음가짐을 라틴어로 ‘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에 대한 예모(豫謀)’라고 불렀다.
 

후기 스토아 철학자이자 제정 로마의 재상이었던 세네카는 여행을 계획할 때 미리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했다. 폭풍우가 갑자기 불어 닥칠 수도 있고 배가 파산할 수도 있다. 지혜로운 자에게는 예상 밖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는 막연하게 최선을 기대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준비한다.

한자 ‘전정(剪定)’은 바로 그런 의미를 품고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고자 미리[前] 자신만의 무기[刀]를 들고 쓸데없는 가지를 치는 용기다.

행복이란 자신에게 허락된 이 무의미한 시간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놀이다. 행복이라는 영어 단어 ‘happiness’는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 동사 ‘happen’에서 유래했다. 행복한 사람은 이 우연한 순간을 운명으로 여기고 최선을 경주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치부하며 그럭저럭 산다.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불행이다. 두려움은 아픔과 고통을 배가시킨다. 우리는 실제보다 그것에 대한 상상으로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심지어 공포 상태로 진입시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생각이다. 해를 당할 거라고 상상하는 순간, 그 폐해는 우리를 엄습해 이내 우리를 질식시킨다.

자신이 바라는 원대한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곳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외부의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하는 내면의 가장 깊숙한 어딘가다. 그곳은 타인이 절대로 가볼 수 없는 장소다.

네 마음속을 깊이 파보라. 그 안에는 착함이라는 샘물이 있다. 깊이 파내려가다 보면 그것은 언제라도 밖으로 분출할 수 있다.
-『명상록』 7.59
 

그가 이 문장에서 사용한 첫 단어 ‘엔돈(endon)’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신의 ‘내면’이다. 내면은 그 존재를 인정하고 응시할 때 조금씩 그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한 자신이다. 이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착함’, 즉 ‘최선’이다.

뒤이어 나오는 ‘아가토스(agathos)’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훌륭한 가치를 표현한 단어다. 아가토스의 의미는 ‘성품이 훌륭한/유익한/탁월한/정직한/행복한’ 등이다.

이 단어는 기원전 3세기 유대인들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에서 히브리어 ‘토브(tob)’를 번역할 때 사용한 그리스 단어이기도 하다. 특히 <창세기> 1장에서 신은 우주를 "보기에 좋았다"라고 말할 때마다 ‘아가토스’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선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아우렐리우스는 그 방법으로 ‘발굴하다’라는 동사 ‘스카프토(skapto)’를 사용한다. ‘발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 ‘excavate’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고고학자들이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유물을 발굴해내기 위해서는 정교한 도구가 있어야 한다. 스카프토는 유물을 상하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괭이로 땅을 파내려가는 마음이다. 불도저를 이용해 막무가내로 땅을 밀어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정성이라는 곡괭이로 자신의 보물을 찾기 위해 매일 조금씩 조심스럽게 파내려가는 행위다.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심연에는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아가토스,
즉 최선이라는 샘물이 숨겨져 있다.

맑고 신선한 물은 산골짜기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다.
샘물은 깊이 파내려갈수록 더 맑고 신선한 물을 공급한다.

샘물은 언제라도 나에게 줄 ‘최선’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샘물을 외면하고 엉뚱한 곳에서 나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목마름을 해소하려 한다.

인간의 내면에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이 숨겨져 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추구하는가?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이리도 허둥대는가? 나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나는 내면에서 분출을 기다리고 있는 ‘최선’을 발굴하고 있는가? 그 샘물을 향해 깊이 파내려갈 도구를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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