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그 자체로 펼쳐진 환경일 뿐이다. 진화는 목적 없이 이루어진다.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일도, 사람이 원숭이가 되는 일도 없다. 각각의 종은 가지를 뻗어나가며 각자의 진화 과정을 밟을 것이다. 그리고 진화한 원숭이도, 진화한 인간도 모두 지구에서 사라지는 먼 미래가 되면, 그때도 진화한 단세포 생물들이 여전히 지구를 점령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나는 고대인보다 지혜로운가? 그들보다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고전이 남아 있어서다. 우리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 안에서 오늘 나의 고뇌와 욕망을 고스란히 비춰보게 되어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는 왜 하필 지금 이 오래된 문서를 들춰보려는 것인가? 그것은 여기에서 당신과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권력, 부귀, 영원에 대한 욕망과 이와 함께 엄습하는 늙고, 낡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회한. 오늘날 우리가 찾아 헤매는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거울에 비치듯 고대인의 사유 속에서 발견된다.

길가메시 서사시

슬픔이 가라앉자 길가메시는 생명의 덧없음을 느꼈다. 그러자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길가메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했다.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인의 삶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 이래 많은 변화와 진보가 있었던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문명 이후의 인류가 같은 세계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입고 다니고 들고 다니는 것들의 형태와 모습은 다를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는 근원적인 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벌거벗은 신체에 던져져서는, 던져진 세계 속에서 때로는 순종하고 때로는 저항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당신과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던져진 세계 속에서 자기만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헤매었다. 길은 가려져 있었고,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주저앉히려 했다.

우리가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려 할 때 가정과 학교와 사회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질문을 멈추라. 그것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따랐다.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했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했다. 모든 인류가 그러했듯 우리는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어느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

하지만 기나긴 역사의 어느 때에 몽둥이를 내려놓은 자가 있었다. 그는 세상의 혼란과 고통을 직시하며 자유를 향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자기 내면의 심오한 질문들과 대면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여기에 던져진 이유는 무엇이고,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휘몰아치는 세상의 폭풍으로부터 벗어나 눈을 감고, 귀를 닫고, 기나긴 침묵 속에서 깊은 내면을 향해 침잠해갔다.

그들을 멈춰 세웠다. 자기 자신을 때리던 몽둥이를 내려놓게 했다.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들을 사람답게 했으며, 자아와 세계의 본질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깨달아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스승이라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축의 시대’라 불리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축의 시대는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된 시대였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공통적으로 위대한 스승들이 거대 사상을 설파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바로 앞선 시기가 세계 각지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를 겪은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21세기의 기술 발전과 함께 등장한 대중매체와 소셜 미디어는 말초적인 욕망을 쏟아내며 우리에게 말한다. 질문을 멈추라. 생각을 멈추라. 다만 소비하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 우리는 다시 혼돈 속에 던져졌다.

오늘 당신과 내가 축의 시대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500년 전, 인류가 맞이한 최초의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위대한 스승들이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 참고하고, 지금 우리의 시대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 지혜, 앎을 말한다. 종교적이고 신화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인 방대한 양의 문헌으로,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다. 《베다》 는 시작도 없고 저자도 없는 경전이라고 말해진다.

인류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구약》 이고, 다른 하나가 《베다》 다.

우선 《구약》 은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뿌리가 된다. 이 세 종교는 인류 절반의 세계관을 형성해왔다. 나머지 절반의 세계관은 《베다》 에 기반을 둔다.

《베다》 는 <우파니샤드>와 힌두교, 불교의 뿌리가 되었고, 이들은 인도와 동양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근대 이후 미국식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받아 《구약》 의 세계관에 익숙한 반면, 인류 절반의 세계관인 《베다》 는 낯설어한다.

우리가 굳이 낯선 세계관인 《베다》 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나의 세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자기 세계의 지평을 진정으로 넓히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내면의 경계를 넘어서야만 한다.

내가 사용하는 신이라는 단어의 개념은 나의 내면의 크기와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우파니샤드>는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선명한 주제 의식을 통해 독자를 심오한 사유의 세계로 초대한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히는 고전이다.

노년에 그는 <우파니샤드>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책은 가장 값지고 수준 높은 지혜다. 지구 위에서의 내 삶의 위안이었고, 동시에 내 죽음의 위안이었다."

<우파니샤드>는 지역과 시대를 넘어 인류의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불교를 통해서 그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업, 윤회, 해탈의 세계관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불교의 열반과 삼고 등 수많은 개념도 여기에서 왔다.

핵심은 세 가지로, 전체로서의 ‘세계’, 부분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이 둘의 ‘관계’다. 세계, 자아, 관계.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탐구하는 분야다.

<우파니샤드>는 불변의 두 가지 근원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바꿔보면 ‘우주 전체’와 ‘나의 마음’ 정도가 되겠다. 이로써 세계는 둘로 구분된다. 즉, 이원론적 세계가 되었다.

<우파니샤드>는 이원론에서 멈추지 않고, 과감하게 한발을 더 내딛는다. 서로 달라 보이는 두 개의 근원이 사실은 하나라고 선언함으로써 세계와 자아의 ③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즉,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라고 한다. 방대하고 심오한 문서인 <우파니샤드>의 결론은 명확하다.

범아일여. 이것이 모든 것의 결론이다. 모든 것이 이 네 글자 안에 담겨 있다. 여기서의 ‘범(梵)’은 브라흐만을 한역한 것이고, ‘아(我)’는 아트만을 한역한 것이다. ‘일여(一如)’는 오직 하나라는 뜻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다.

<우파니샤드>의 결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 밖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의 실체와, 네 안에 펼쳐진 자아의 본질은 궁극으로 하나다."

범아일여는 오늘날의 인문학이 다루는 세 가지 주제를 모두 담고 있다. 우선 ‘범’, 브라흐만은 세계 전체를 의미하므로 오늘날의 의미에서는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다음으로 ‘아’, 아트만은 자아를 뜻하고 오늘날의 ‘자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마지막으로 ‘일여’는 오직 하나라는 뜻이므로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지금부터 이 세 주제를 따라가며 범아일여가 도대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체득해보려 한다.

당신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뿐이다. 당신의 1인칭 관점, 무엇인가를 보는 자,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능력, 관조하는 무엇, 다시 말해 텅 빈 의식만이 남아 있다.

자아의 본질이 의식임을, 하나의 투명한 의식 능력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계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된다. 즉, 자아는 하나의 등불이고 세계란 그저 그 등불이 비추는 범위임을 알게 된다.

실재론은 상식적인 세계관으로, 세계가 자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반면 관념론은 자아가 세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우리가 세계를 본다는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이 그려낸 이미지로서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은 그저 내 마음을 본다. 이러한 세계관은 상식적이지 않다. 관념론에 따르면 진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 의식, 관념일 뿐이다. 내 앞의 세계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가상이다. 그래서 인도인은 이 세계를 환영이라는 의미의 ‘마야’라고 불렀다.

실재론의 세계관에서는 세계와 자아가 분리된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세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세계와 자아의 존재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 하지만 관념론의 세계관에서는 세계와 자아가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수정구슬과 그 안에 왜곡되어 담긴 세계의 이미지는 떼어지지 않는다. 즉, 자아가 사라지면 세계도 함께 사라진다.

하나의 사상이 별다른 변화 없이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이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파니샤드

<마하바라타>는 총 18권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로,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라타족의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하바라타라는 이름 자체가 ‘바라타족의 전쟁에 대한 설화’라는 뜻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신의 노래’ 혹은 ‘거룩한 자의 노래’란 뜻이고, 줄여서 <기타>라고 부른다. 이 문서는 《베다》 , <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의 3대 경전이자 가장 중요한 철학서로 여겨진다.

"어떻게 내가 저들의 피를 솟구치게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저들을 파괴하고 내가 얻는 것이란 무엇인가? 동료와 친척들을 파괴함으로써 왕국과 권력을 얻는다면 내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직업 안에서 의무를 다하는 과정을 거치며 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르주나여. 그대는 크샤트리아이고, 그대의 의무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의심을 위한 시간은 지나갔다. 지금은 행동을 위한 시간이다. 거기에 머뭇거림은 있을 수 없다."

"아르주나여. 그대는 두려움 없이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 행위에 대한 보상과 영광과 성공에 대한 그 어떤 바람 없이 행동해야 한다. 올바른 행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기대, 어떠한 성공을 위한 바람조차도 없는 것이다."

세속과 탈속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이 너에게 쥐여준 의무를 행하라. 그리고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행위는 업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너를 신에게 향하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의지를 상실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부모로서의 의무, 자녀로서의 의무, 학생으로서의 의무, 직장인으로서의 의무, 시민으로서의 의무 등. 우리가 그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주저할 때, 크리슈나는 우리에게 지혜롭게 말해주는 것이다. 네가 준비해왔던 바로 그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행하라. 다만 그것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너의 마음은 평온해질 것이고, 자유로워질 것이며, 네 안의 신에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타>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다.

힌두라는 말 자체가 인더스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신두(Sindhu)에서 왔다. 신두는 ‘큰 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힌두교의 실제 뜻은 그저 ‘큰 강 주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유 체계’ 정도가 된다.

윤회는 산스크리트어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수레바퀴를 상징으로 사용한다. 수레바퀴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처음의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처럼 인간의 삶과 죽음도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돌고 돈다는 관점이다.

특히 이러한 윤회의 모습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카르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업(業)’이라는 단어는 카르마를 한역한 것이다. 인도인은 자신이 행하는 행위의 과보에 따라 선한 카르마 혹은 악한 카르마를 쌓게 되고, 이로 인해 짐승, 인간, 천신으로의 삶을 반복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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