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과 노동은 다르다. 약점 파악, 목표 설정, 집중 훈련과 반성의 피드백이 수반되지 않는 작업은 노력이 아니라 노동이다.
하루 5분 공부 각오 : 365일 절대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힘 | 한재우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상실의 시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해." 당신의 공부를 생각해보자. 당신은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하루 5분 공부 각오 : 365일 절대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힘 | 한재우
당신에게는 지금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 당신은 지금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우리의 삶은 끝까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죽더라도 미련이 남지 않을 인생을 사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품성을 가리키는 완벽한 표식이다. 광분하지 않고, 무기력하지 않으며, 어떤 위선도 없이 모든 하루를 너에게 주어진 마지막처럼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7.69
자네에게 말하지만 오직 건강하게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게··· 완벽한 확신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게. 어떤 확신이냐고? 제약받지 않으며 빼앗길 수도 없는 자네만의 합리적 선택을 유지하는 것이네.
에펙테토스, 대화록, 3.26.23b-24
죽음이 숨 막히게 짓눌러 올 때 / 대단히 잘 살았다고 알려진 자조차 /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죽나니.
세네카, 튜에스테스, 400
우리는 언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내가 누구였는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으며 무엇을 이루어 놓았는지, 무엇이 내게 소중했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 대한 한 줄의 답조차 말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삶만큼 허망한 삶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끝을 맞는다. 죽음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이야기는 모두 동일한 결말을 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몰입해야 할 것이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우주에 비하면 너무도 하잘것없지만, 그 인생이 없었다면 우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작고 작은 생명들이 존재하고 모이지 않았다면 넓고 넓은 우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 시간이 우주의 시간이고, 내 삶이 우주의 삶이다. 삶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어찌 충실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음이 진실로 종말을 의미한다면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두려움, 고통, 걱정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희망까지, 모든 것이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면 기억하자. 죽음이 오는 순간 두려움도 끝이 난다.
나이 외에는 오래 살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늙은이들이 너무 많다.
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해, 3.8b
얼마나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얼마의 시간을 살든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불멸에 대해 쓰면서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인용에 기대어 주제를 풀어가는 작가의 고뇌를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인용하는 것이 싫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다."
세네카가 2천년 전 우리에게 던진 화두가 바로 이것이다. 현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쉽다. 특히나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자신만의 것, 자신만의 생각을 펼치기는 어렵다.
남들로부터 빌려오지 않고 어떻게 자신만의 생각을 창조할 수 있는가? 과거의 현자들은 어떻게 독창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경험에 가치가 숨어 있다. 자신만의 지혜를 축적한 그 길 위에 답이 있다.
세네카는 말했다. "빼앗겨서 슬플 것은 없다. 그러나 이룬 것 하나 없이 그저 늙었다는 이유로 가야 한다는 것은 진실로 슬퍼해야 할 일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면서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잡담을 나누고 식탐에 빠지고 쾌락에 몰두한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과연 두려워할 수 있는가? 정체도 모를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러한 죽음을 핑계로 욕망에 허우적대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삶에 몰입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살아가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낭비한다. 인생은 충분히 길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만큼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사치와 태만의 하수구로 흘려보내고 좋은 목적에 사용하지 않게 되면 시간이 지나가버렸음을 인식하기도 전에 시간은 지나가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짧은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세네카, 삶의 덧없음에 대해, 1.3-4a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본질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기억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억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해야 하네. 감사가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의가 타인에게만 속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네. 감사하는 태도는 언제나 몸집을 부풀려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네.
세네카, 윤리적 서한, 81.19
감사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나를 위한 것이다. 감사는 쌍방향이다. 그리고 긍정적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한 사람의 감사 표시는, 그 전염성으로 말미암아 그날 하루 수백 명의 사람을 기쁘게 할 수도 있다.
감사는 삶에 대한 최고의 긍정이자, 타인에 대한 최고의 배려이며, 내 자신에 대한 최고의 격려다. 감사할 순간이 온다면, 정의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할 순간이 온 것처럼, 머뭇거리지 말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자.
더 이상 방황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의 비망록도, 고대의 역사도, 노년에 읽기 위해 수집해 놓은 문집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의 목적에 충실하라. 헛된 희망일랑 던져버리고 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여라. 너 자신을 돌보고 싶다면 할 수 있는 동안 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3.14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목적은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책을 옆으로 제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해야 할 일은 행동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책에도 답이 쓰여 있지 않다. 선택과 결정 그리고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가 아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내일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신에게 기도를 드릴 것이 아니라 내 행동으로 실천에 옮겨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