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남들이 먼저 그려 놓은 대로 살 필요는 없으니까.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괜찮은데?’라고 답할 수 있는 건 혼자서도 잘 노는 ‘프로 사브작러’의 기질도 한몫하겠지만, 더욱 큰 이유는 원래부터 아이가 없었으니, 아이가 없는 빈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남겨진 사람은 서서히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지만, 각자 서 있는 법을 아는 사람이니까.

대부분 나에게 ‘결혼했으면 애를 낳거나’, ‘사람이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웃으며 답한다.
"괜찮아요, 남편이 잘 버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잘’은 빼야겠지만, 안타까움으로 포장한 오지랖에 백치미로 답한다. 약발이 잘 먹힌다.

"나는 네가 돈을 벌어오는 걸 바라지 않아. 네가 행복한 걸 바라지. 취직 안 해도 돼. 그냥 놀아."

출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오자, 나의 가치는 0원이 되었다.
0원.
천하에 쓸모없는 사람 같았다. 나라는 사람은 남편에게 빨대 꽂고 살아가는 빈대 같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안 낳은 사람도, 한 명 낳은 사람도, 세 명 낳은 사람도 불편을 느끼지 않고, 상대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삶에 집중하는 날이 언젠가 오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결과론적인 변명일 수 있으나,
낳지 않아 다행이다.
휴….


솔직히, 처음부터 다 가지고 시작한 사람들과 경제적 격차는 부럽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걸 샘내봤자! 시간 낭비, 감정 낭비다. 아이러니하게도, 대가 없이 주어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더라.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얻었다.
"남편이랑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좋아. 예전보다 점점 더 좋아지는 거 같아."


"남편이랑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좋아. 예전보다 점점 더 좋아지는 거 같아."
네 명의 SNS에는 남편과 산책하며 들린 카페나 공원 사진이 자주 올라온다. 별것 아닌 작은 일상에 감사할 줄 아는 것. 허름한 신혼집에서 조금씩 생활 터전이 나아지는 것에 감사했던 마음. 어려웠기에, 그럴수록 함께 다독이며 걸어왔다. 우리가 만들어낸 돈독함은 큰 자산이다.

집이란 무엇일까? 옆에 있고 싶은 사람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 아닐까? 간혹 경제적인 문제로 자신을 한없이 작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초라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무엇을 채워가고 있느냐는 다른 차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한번은 깊게 자신을 돌아보고, 배우자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저들의 얼굴이 저렇게 편안해 보이는구나’ 생각하며 나도 그리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삶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과 만나는 건 작은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첫인사는 여전히 어색하겠지만.

시간 아깝다. 나이 들면 꼭 배워야 하는 기술이 있지 않은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오지랖에 대처하는 방법이 바로 이거다. 신경 쓰지 말자. 내 인생에 단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말들이니까.

저런 사람들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쓰레기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여기저기 쓰레기를 투척하고 다니겠지. 누군가 설득하려 해도 전혀 통하지 않겠지. 이미 여러 번 비슷한 말다툼을 했을 테고, 대부분 자신이 옳은 말을 한다 생각하겠지. 저런 할줌마와의 대결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도망쳐!

내 주변의 많은 무자녀 부부들이 그러했다. 아내가 아플 때 남편이 먼저 아이는 포기하자 말한다.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 해도 아내가 그럼 우리 둘이 예쁘게 살자 말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우선하지 않았다. 내게 가장 소중한 건 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랜 시간 함께 어려움을 헤치며 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무자녀라는 이야기를 해도 요즘은 "그래, 둘이 안 싸우고 행복하면 되지, 애 키우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냐"라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훨씬 많다. 그런 분들께는 "아유, 뭘요. 훌륭한 자제분들 있으셔서 얼마나 든든하세요"라는 맞장구가 절로 나간다. 서로의 삶에 한 번씩 지지가 오가면 좋은 친구가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해가 갈수록 느끼고 있다. 예전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긴장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 선언하니…. 어디 가서 자식 자랑할 수 없는 상황. 늘 남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재미에 살아오신 두 분이신데 자식 문제에서만큼은 조용히 계셔야 하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부모님들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주셨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표현은 안 하시지만, 그분들의 섭섭함이 찌릿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를 위한 선택이 부모님의 기쁨을 하나 지웠다.

부모님을 생각해서 아이를 낳겠다고 마음이 변한 건 아니다. 단지, 내 선택 때문에 나와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마음 한편에 빈자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죄송할 뿐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내 삶이 자연스레 흘러온 과정이기에 죄송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란 딸로서 부모님께만큼은 죄송하다. 이 마음의 짐은 내가 계속 책임지고 가져가야 할 숙제일 거다.

한 경제학자는 "지금의 노인들은 후진국에서 태어났고, 중장년층은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났다. 요즘 아이들은 선진국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같은 나라지만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자랐기에 충돌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언어폭력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누군가 ‘그것은 언어폭력입니다. 그만하세요’라고 정확히 말을 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자. 그리고 상대가 불같이 화를 내려고 하면, 재빨리 도망치자.
지금은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니까.

그래서 마지막 일주일까지 스스로 걷기 위해 오늘도 운동을 한다.

결혼은 여러 가지를 고민해야 한다. 나부터 결혼에 적합한 사람인지, 당연했던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도 너는 짝이 있어서 외롭지 않잖아."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눈빛 교환만으로 산책을 함께할 수 있다는 상대가 있는 건 좋다. 풀이 죽어 돌아와도 마법처럼 내 자존감을 올려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도 든든하다.
그러나 그 사람과 떨어져 있는 시간도 존재하며, 생각이 서로 다른 시간, 감정이 다른 시간도 존재한다. 거기에 맞춰야 한다거나, 다름을 받아들여야 할 때, 혼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됨이 있다. 이는 내가 결혼을 했기에 따라온 고됨이다. 어느 길이든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다.

뭔가로 부딪혔을 땐 상대방의 방법을 먼저 시도해 본다. 그리고 다시 맞춘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한 걸음 다시 앞으로 나가보는 것. 그게 아니라면 슬쩍 옆으로 비켜서 기다려본다.

《미움받을 용기》의 작가 기시다 이치로는 "인생이란 마라톤이 아니라 춤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뒤로 옆으로 앞으로 쿵짝 쿵쿵짝 움직여 보는 것. 그것이 둘이 사는 재미가 아닐까? 가끔 대차게 상대방의 발등을 밟긴 하지만, 서로 맞춰가는 과정을 춤이라 생각하니 이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 듯하다.

아이만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 덕에 그렇게 한고비를 넘기고,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간다면 그 또한 멋진 경험이겠지.

우리는 둘뿐이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안도가 되는 존재인 건 서로가 마찬가지다. 남편도 내게 그런 존재이다. 단둘뿐인 가족이라는 사실이 더 그렇게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사람이 내게 미치는 영향력이 이렇다. 아무리 억울한 상황이라도 이 사람이 알아준다는 사실 하나에 우울한 감정은 싹 사라진다. 내 감정을 읽어주는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참 ‘땃땃’하고 든든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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