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누군가의 영광을 보았다면 저녁이면 그의 몰락을 볼 것이니, 누구도 승리의 영광을 오랫동안 신뢰할 수 없으며, 누구도 앞날의 희망을 쉽게 포기해서도 안 된다. 클로토가 인간의 실을 잣고 멈추나니, 그녀가 쉬는 틈에 행운이 찾아오고, 운명의 물레는 쉴 새 없이 돌아가지만, 신의 호의를 오랫동안 받을 수 있는 자, 이 세상에는 없으니, 그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내일을 보증한다네. 신이 우리의 삶으로 돌진해 오는 동안에도, 운명의 물레는 돌개바람처럼 돌아가나니.

세네카, 튜에스테스, 613

자네의 명성도, 돈도, 지위도 신뢰하지 말게. 오직 자네의 힘, 즉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자네의 판단력만을 신뢰하게. 이것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제한받지 않도록 하지. 이것만이 깊은 수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고 부자와 권력자들에 맞설 수 있게 하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3.26.34-35

기억하라. 당신은 연극에 출연한 배우로 극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을 연기해야 한다. 그가 짧은 연극을 원한다면 짧을 것이요, 긴 연극을 원한다면 길 것이다. 그가 거지 역할을 바란다면 그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그가 불구자, 우두머리, 혹은 평범한 사람의 역할을 맡기더라도 잘 해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의무다. 당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수행하라. 하지만 배역 선택의 권한은 다른 이에게 있다.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17


운명에 순응하라는 것이 거지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다. 거지와 불구자는 역경에 대한 비유일 뿐이다. 삶은 주사위 도박처럼 무작위적이다. 스토아 사상은 이렇게 무작위적인 삶에서 역경이 닥치더라도 한탄하지 말고 돌파할 것을 당부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우리가 명배우가 될 수 있는 길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한 사원은 23년마다 재건된다. 이러한 사이클이 60번 이상이었다고 하니 이 사원의 나이는 1400년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60번 연이어 새롭게 지어진 사원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스냅사진과 유사하다. 아주 짧은 시간의 기록일 뿐이다. 우주는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우리의 손톱도 조금씩 자라고, 깎이며, 또 자란다. 새로운 피부가 죽은 피부를 대신하며 오래된 기억은 새로운 기억으로 대체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사람인가?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이들도 동일 인물인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주는 변화하며 삶은 의견일 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3.4b

외부 사건으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 그리고 우리는 즉시 그 판단을 없애버릴 수가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47

우리 또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합리적 선택의 힘이 미치는 것들에서만 선과 악을 판단한다면 신을 탓할 이유도 악의적인 타인을 원망할 이유도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우리의 삶은 자신의 합리적 선택으로 시작해, 합리적 선택으로 끝이 난다. 외부 사건은 통제할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태도, 사건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오직 도덕적이고 강한 자만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다.

공적 생활에 대한 불평을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라. 너 자신의 귀에 들려서도 안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9

영국의 수상이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좌우명이 이것이다. "불평하지도 설명하지도 말라."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책임감이라는 짐은 막중하다. 이것저것에 대해 불평하기는 쉽다. 저질러 놓은 일을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것도 쉽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담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다가올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나타났다 사라지는지를 생각하라. 실체는 쉼 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존재들의 활동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존재들의 원인은 무한히 변동하기에 그 자리에 굳건히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23

헤카토가 말했네. "희망하지 않으면 두려움 또한 종식된다."··· 이 두 질병(희망과 두려움)의 가장 큰 원인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은 채, 생각만 너무 앞질러 갔기 때문이라네.

세네카, 윤리적 서한, 5.7b-8

희망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이에 반해 두려움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로도스의 현자라고 알려진 헤카토에게 이 둘은 동일한 것이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추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희망과 두려움은 모두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현재의 적이다. 둘 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에 대항하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의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희망과 두려움 속에는 갈망과 걱정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함유돼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갈망은 걱정의 원인이 되고, 걱정은 다시 갈망을 유발한다.

철학이 오만과 아집으로 행사될 때 수많은 파멸의 원인이 된다네. 철학으로 하여금 타인의 허물에 격분하도록 두지 말고 자네의 허물을 벗겨내도록 하게.

세네카, 윤리적 서한, 103.4b-5a

철학이란 선체가 부식되지 않도록 배 밑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벗겨내듯 자신의 실수를 걷어내는 것이다.

1. 참된 것만을 받아들여라.

2. 공익을 위해 행동하라.

3. 통제할 수 있는 것만을 갈망하라.

4.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라.


다음 세 가지 생각을 항상 유지하면서 그 명령에 따라 어떤 도전이라도 받아들여라. "신과 운명이 나를 이끌어주며 오래 전 나를 위해 그 목표를 정해 두었다. 나는 그를 따를 것이며 휘청이지도 않을 것이다. 설사 내 의지가 약할지라도 나는 하던 대로 할 것이다."(클레안테스) "누구든지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현명하다고 생각하라. 나머지는 신의 문제이다."(에우리피데스) "이것이 신을 기쁘게 한다면 그대로 두라. 그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플라톤, 크리톤의 변명)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53

만약 우리가 현재를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보는 것이요, 태곳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원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동일한 종류의 현상과 관련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6.37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시간이 흘러간다고 늘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순간이라도 현명한 사람이 된다면 영원히 덕을 수행하는 사람만큼 행복할 수 있다(크리시포스)

(Loeb, p.682)플루타르크, 모랄리아 : ‘상식에 반하는 스토아 철학’ 1062

행복의 순간을 붙잡으려고도 유지하려고도 하지 마라. 시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즐기고, 인식하고, 기억하라. 잠깐 누리는 것은 영원히 누리는 것과 동일하다.

아름다운 유리컵을 가진 선승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컵은 이미 깨졌다." 그는 컵을 아끼고, 즐겨 사용했으며, 방문객들에게 컵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일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컵이 정말 깨졌다. 선승은 이렇게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

에픽테토스와 램프에 관한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그에겐 아주 값비싼 램프가 있었지만 문단속을 하는 법이 없었고, 어느 날 그 램프를 도난당하고 만다. 에픽테토스는 미련 없이 싼 것으로 교체를 했다. 다시 도둑맞아도 될 만큼 아주 싼 램프였다.

파괴, 손상, 분실에 따라오는 감정은 불쾌한 것이다. 하지만 겨울철에 눈이 왔다고 혹은 장마철에 비가 왔다고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사람은 없다. 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겠는가? 가능성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찌 상실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짧게 말하겠네.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게. 합리적 선택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자네의 선택 능력이 파괴될 것이야.

에픽테토스, 대화록, 4,4.23

에픽테토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집착으로 인해 인간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 번 갖게 되면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게 계속 유지하려다가 소유한 것의 노예가 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잠깐 가지거나 잠시 누리는 것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전부이다. 영원한 것은 스토아가 말한 합리적 선택 능력, 오직 그것뿐이다.

상실의 고통을 경험할 때마다 신체의 일부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깨질 수 있는 유리처럼 생각하게. 이를 기억해야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야. 자네의 아이, 형제자매, 친구에게 입맞춤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네. 그것이 자네가 바라던 최상의 경험이었다 할지라도,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장군들도 죽음을 회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네. 단지 잠깐 주어지는 것일 뿐, 영원히 가질 수는 없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3.24.84-86a

엘리자베스 비숍은 상실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많은 것들은 언젠가는 상실될 의도로 채워진 것이니 그것을 잃는다고 재앙은 아니다··· 더 많이 잃고, 더 빨리 잃는 연습을 할 것. 그것을 잃는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니."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의 <네 잎 클로버는 없다 No leaf Clover>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터널 끝에서 부드럽게 빛나던 저 불빛이 그저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화물열차였다니.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는 어떤 대화가 문제해결을 위한 것인지, 갈등의 원인인지 이미 예감하고 있다. 갈등이 일어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굳이 자발적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다.

"무엇이 일어나든 괜찮아질 것이다."

어떤 일이든 이성의 지시를 따르는 자에게 마음의 평정과 적절한 행동이 따라온다. 그들은 쾌활하면서 동시에 침착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0.12b


매일을 마지막처럼

삶의 마지막이 다가온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세. 아무것도 미루지 않도록 하세. 그리고 하루하루 인생의 대차대조표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세··· 매일을 마지막처럼 사는 자에게는 결코 시간이 부족하지 않으니.

세네카, 윤리적 서한, 101.7b-8a

그런데 그 이유는 ‘현재’ 때문이다. 과거를 바꿀 경우 현재 또한 바뀌기 때문이다. 결국 되돌리거나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시간은 오로지 현재다.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자. 지금이라도 바로 이승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11.1

철학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외적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지. 나무가 목수에게 필요하고 청동이 조각가에게 필요한 것처럼 철학은 우리가 삶의 기술을 완성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재료일 뿐이야.

에픽테토스, 대화록, 1.15.2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삶을 알아야 죽음을 알 수 있고, 죽음을 알아야 삶을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철학이 존재한다.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예정된 운명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또 할 수 있는 한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17

끝이 난 것처럼, 이미 죽은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삶을 생각하라. 남은 것을 여분의 은혜라 생각하고 자연의 본성에 맞추어 살라. 운명이 당신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고 주어진 역할을 다하라. 그것 외에 무엇이 더 잘 어울리겠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7.56-57

지금 느끼는 감정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감정 속에서 기대치와 불쾌감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면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롯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토아가 말한 슬픔을 정복하는 방법이다.

다짐하건대, 나는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에게는 내게 주어진 단 하루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해, 1.11b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무한히 되풀이된다." 이것이 바로 영겁회귀다. 니체는 근대인들의 직선적인 시간관이 그릇됐다고 말한다. 직선적인 시간관은 삶의 의미를 오늘이 아니라 미래에 두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에 대한 힘겨움과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삶이란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니체의 허무주의이지만 그 허무주의에는 현재의 삶에 대한 긍정이 숨어 있다. "삶은 영원히 되풀이된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더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이란 바로 그런 정신적 자유를 얻은 사람을 말한다. 현재의 삶에 대한 조건 없는 긍정과 충실함이야말로 영겁회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당신이 정상 체중이라면 몸무게가 두 배로 불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수명이 길지 않다고, 더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품는가? 체중에 만족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도 만족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6.49

세네카는 "어떻게 쓰는 줄만 알면 삶은 충분히 길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삶을 낭비하면서 더 긴 삶을 원하기만 한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서 몸이 건강하길 원하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서 체력이 좋아지기를 바란다. 텔레비전만 보면서 지식이 늘어나기를 바라며, 빡빡한 스케줄의 여행만 다니면서 경험이 풍부해지길 바란다. 시간이 더 늘어난다면 삶을 낭비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하고 있는데 늘어난 수명이 무슨 소용인가? 헛되이 버려진 시간을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