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 결국엔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마라.

누군가는 우리를 사슬로 묶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꿀 수는 없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고문과 잔인함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힘이 인간에게는 있다

자네가 누구인지를 숙고하게.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진 합리적 선택보다 위대한 힘은 없네. 그것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감독하게.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2.10.1

운명의 여신에게 속지 않는 한, 운명에 의해 파괴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시절 거만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변화 속에서도 거품이 꺼지지 않습니다. 어떤 변화에도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천하무적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시절 그들이 보여준 힘이 역경에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 어머니 헬비아에게 보내는 위로, 5.4b, 5b-6

두려움에 압도를 당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면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지고 비탄 또한 끝이 없게 된다.

세네카, 윤리적 서한, 13.12b

‘공포심은 단지 불행을 창조하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할수록 두려움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시련과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두려움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이고,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두려움을 거절해야 하는 이유이다.

자네가 얼마나 의지가 있는지 시험해 보겠나? 일주일 동안 퍽퍽한 싸구려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그리고 다 낡아 해진 옷을 입어야 한다면 자신에게 물어보게. 이것이 자네가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인지를. 좋은 시절일 때 우리는 다가올 힘든 시기를 위해 대비해야 한다네. 운명은 우리 앞의 햇살이 따사로울 때 자신의 잔인한 이빨과 발톱을 갈아두는 짐승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군인들은 평화로울 때 병법을 수련하고 적이 시야에 없을 때 참호를 판다네. 자신이 지쳤을 때 공격해 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대비를 하지.

세네카, 윤리적 서한, 18.5-6

"위기가 닥쳤을 때 궁지에 몰리지 않으려면 오기 전에 준비하라."

동료 없이 식사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자. 노예를 두지 않는 삶에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본래의 목적으로 옷을 입는 데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좀 더 합리적인 넓이의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에도 익숙해지도록 하자.

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해, 9.3b

어떤 사건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네. 우리가 두려움을 지배하고 두려움을 막을 수 있는데도 어떻게 내면의 요새가 파괴되는지 아는가? 칼에 의해서도 불에 의해서도 아니야. 단지 판단 하나 때문이야··· 우리는 여기서 시작해야만 해. 이 성벽을 꽉 부여잡고 달려드는 이 폭군을 던져 버려야 해.

에픽테토스, 대화록, 4.1.85-86;87a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내면의 성채’ 역시 파괴될 수 있다고. 그것은 안으로부터의 배신 때문이다. 성벽 안에 사는 주민들이 두려움이나 탐욕에 굴종하는 순간 성벽의 문이 열리고 적들이 몰려 들어온다. 이것은 우리가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굴복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요새의 성벽은 굳건하다. 요새를 배신하지 마라.

우리는 사적으로, 늘 아주 강렬한 무언가를 열망하며, 신의 힘으로 우리의 삶에 마법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는 것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태도와 힘을 바란다면 어떻게 될까?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안에 이미 갖춰진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우리의 기도는 벌써 응답을 받았을 것이다.

생각도 익을 시간이 필요하다

첫 번째 훈련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네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 잠시 동안 자신을 위해 철학을 하게. 마치 농사를 짓는 듯한 태도를 가져야 해. 계절에 맞춰 묻어둔 씨앗이 조금씩 자라 완전한 과실이 되는 것처럼. 줄기가 돋기 전에 흙을 파낸다면 결코 열매가 익을 수가 없을 것이네. 자네는 그와 같이 자란 유실수이어야 하네. 빨리 결실을 보려 하면 자칫 겨울이 자네를 죽일 수도 있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4.8.35b-37

이 책을 읽은 후 이런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좋은 말들이야. 받아들이겠어. 이제부터 나는 스토아학파야."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철학에 동의했다고 그 뿌리가 우리 내면에 완전히 자리 잡는 것은 아니다.

어마어마한 장서 목록을 소유하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웃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앞마당을 가꾸는 사람과 같다. 철학이란,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마련할 때처럼 순수하고 자족적인 행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스토아 사상의 씨앗도 오랜 기간 묻혀 있었다. 스토아의 생각도 육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훈련한다면 삶에 혹독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강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은 하찮고 볼품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도 찾아오지만, 오직 위대한 사람만이 재앙과 불운에 대항해 업적을 남긴다.

세네카, 섭리에 대해, 4.1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유전적으로 우월한 용모를 가졌거나, 상류층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남들보다 손쉽게 경력을 쌓아 올라간다. 계획 같은 것이 없어도, 오히려 무모한 결정을 했는데도 실패와 마주하지 않고 상처도 상실도 없이 삶을 살아간다.

고통을 겪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라.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그로써 나의 교양이 비하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공공의 선을 위해 행동하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에피쿠로스의 말을 기억하라. "고통은 참아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결코 끝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고통의 한계를 기억하고 상상력을 보태 실제 이상의 것으로 만들지 마라." 흔히 내는 짜증도 변형된 고통이며 불면, 흥분 그리고 식욕을 잃는 것 또한 고통의 일종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것에 불만을 품는 순간 고통에 굴복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7.64

"자연은 자비롭다. 자신의 영역 안에 돌보지 않는 사물이 없다. 오직 인간의 개입만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삶은 위태로운 것이지만 두려움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나아진다." 이겨낸 자만이 강인함과 우아함을 얻는다.

액션 스타 브루스 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일만 번의 발차기를 한 번에 훈련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한 번의 발차기라도 일만 일 동안 훈련하는 자가 두렵다." 반복의 힘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도 행동할 수 있다.

여가가 주어져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네. 살아 있으면서 이미 무덤에 묻힌 자들이지.

세네카, 윤리적 서한, 82.4

왜냐하면 평화조차 더 많은 걱정거리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야. 한때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불러 일으켰던 안전한 상황에도 더는 마음을 열 수 없게 되네. 한때는 든든했던 것이 맹목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더는 안전함을 가져다주지 못하지. 이제 위험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달아나려고 하지. 그러나 등을 돌리고 달아나면 더 큰 재앙을 만나게 된다네.

세네카, 윤리적 서한, 104.10b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힘이 있다. 어떤 역경이라도 우리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을지언정 ‘내면의 성채’까지 침범하지는 못한다.

벌집에 이롭지 않은 것은 꿀벌에게도 이롭지 않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6.54

"공동체에 해롭지 않은 것은 개인에게도 해롭지 않다."

혀와 함께 여행하지 말고 발과 함께 여행하라.

제논, 디오게네스의 강의에서 인용, 탁월한 철학자들의 삶, 7.1.26

넘어지고 난 후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기억하라.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잔인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일 때 특히 그렇다.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잘못을 저지른다. 불의한 인간은 스스로에게도 불의한 짓을 한다. 그들은 자진해서 악덕을 쌓아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9.4

기준을 정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물과 사건들을 계량할 수 있다네. 철학의 결과물도 바로 그와 같네. 면밀히 검토한 후 자신의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지. 하지만 참된 인간만이 자연의 본성에서 비롯된 기준을 사용한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2.11.23-25

그렇다면 어떤 기준이어야 하는가? 나만의 기준? 아니다. 스토아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기준은 독선과 오만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라고 했다. 타인의 기준? 아니면 사회의 기준? 아니다. 이 역시 스토아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맡기는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가장 분주한 길이 우리를 가장 많이 속인다." 세네카의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솔직히 말하겠다고 해놓고 기만과 거짓을 꾸미는가? 친애하는 친구여, 자네는 어떤가? 그러나 자네의 말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상대를 흘깃 보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목소리의 느낌, 눈동자의 흔들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진솔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냄새를 풍기는 염소와 같다. 함께 있으면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는 법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1.15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6.6

상처를 보고 복수를 꿈꾸는 것보다 치료하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다. 복수는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처음보다 더 많은 상처에 우리를 노출시킬 뿐이다. 분노는 상처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그러니 악에는 악으로 맞서지 않고 그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노새를 차고 개를 물어서 분풀이를 하겠다는 사람을 누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세네카, 분노에 대해, 3.27.2

하지만 화로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해결은커녕 갈등과 충돌을 초래할 뿐이다. 진정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다면 둘 중의 하나다. 첫째는 이성적으로 그렇게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통할 것 같지 않은 상대라면 화를 내기보다는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낫다. 어느 경우든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해결책을 찾아야지 화를 찾아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우리의 판단에 달렸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암초를 돌아서 먼 바다로 나아가는 배처럼 잔잔한 물결, 좋은 날씨, 그리고 안전한 항구를 찾을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2.22

늑대가 친절하다고 양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잘못된 우정을 피하라. 선량하고 진솔한 사람들은 눈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이니 놓칠 수가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1.15

당신은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수없이 방황만 했다. 행복은 논리에 있지 않으며, 부에도, 명성에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에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연적 본성에 맞추어 행동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도덕원칙을 욕망과 행동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덕원칙은 무엇인가? 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에 관한 원칙이다. 사람을 정의와 자제, 용기와 자유로 이끌어가지 않는 것들은 해로운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파괴하는 것은 예외 없이 해로운 것이다.

(5)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1.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방향을 제대로 찾는 사람은 드물다. 중요한 점을 놓쳤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그 질문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질문을 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그 질문이고 우리의 삶이 바로 그에 대한 답이다."

여행을 하고, 책을 읽고, 신망이 두터운 현자를 찾아가도 우리가 원하는 답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답은 우리의 행동 속에 있으며 스스로 찾아야 한다. 정의, 자제, 용기, 자유와 같이 자명한 도덕원칙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려고 할 때 답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다.

사람들의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재능이 자네에게는 없는가? 그렇다면 받아들여라. 하지만 자네에게는 태어났을 때부터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수많은 다른 자질들이 있다네. 정직함, 자존감, 인내, 자비, 자족, 검소함, 친절, 자유로움, 쾌락을 피하는 능력, 아량과 같은 자네만의 능력을 세상에 보이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5

우리는 좋은 것들만이 자신의 앞길에 펼쳐지길 희망한다. 좋은 소식, 좋은 날씨, 그리고 행운과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변덕맞아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도 금방 사라지곤 한다. 변하지 않고 영원히 좋은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의 선善은 상황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기본적인 과제가 있다. 하나는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에너지와 잠재력을 낭비하면서 두 가지 과제 중 어느 것 하나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 가지 과제의 수행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 스토아 사상가들은 말한다. "잡념으로 이끄는 것에, 감정을 파괴하는 것에, 그리고 외부의 압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삶의 허락된 시간 안에 무엇을 해야 나에게 최선인가?" 거대하고 위대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작은 일이 모여 큰일이 되고, 작은 성취가 모여 큰 성취가 된다. 그 모든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해 자투리 같은 것만을 남겨둔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만을 남겨두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세네카, 삶의 덧없음에 대해, 3.5b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저축하고 남은 돈을 쓴다고 한다. 인생에 대한 공부 또한 이러해야 한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볼 시간을 가진 다음, 친구를 만나거나 텔레비전을 봐도 늦지 않다. 하지만 그 반대로 하면 인생은 계속해서 뒤처질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내 의지를 방해받아 본 적이 없네. 내 의지를 강제하는 일을 겪은 적이 없었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내 선택을 신의 의지와 함께하도록 묶어놓으면 된다네. 신의 의지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나의 의지야. 신의 의지로 내가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야. 그가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갖게 하고 나에게 무엇을 주고자 한다면 나는 그와 동일한 것을 희망할 것이야. 신이 바라지 않으면 나 또한 희망하지 않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4.1.89

변화하는 것들 중에 악한 것은 없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상황에 맞서 저항하는 것들 중에 선한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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