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네들이 단지 읽고 쓴다고 해서, 심지어 밤새도록 그렇게 했다고 해서 자네들이 열심히 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네. 무엇을 위해 하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성실하다고 말하지 않겠네··· 자신의 지배적인 도덕원칙을 위해 그것을 할 때에야 비로소 자연이 우리에게 준 본성과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겠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4.4.41;43

‘하고 있는 일’로 스스로를 평가하지 말고, ‘왜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성취하려 하는가?’로 평가하라. 여기에 좋은 답을 할 수 없다면 그 일을 그만두어도 좋다.

플라톤의 이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릇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새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한 번에 조망해야 한다. 재산, 무기, 농장, 결혼과 이혼, 탄생과 죽음, 법정에서의 소란, 불모의 땅, 외국인들, 축제, 장례식과 시장 등등. 뒤섞여 있는 모든 것들 속에 숨어 있는 이면의 질서를 바라보라."

우리는 어떤 일을 원할 때 꼭 그것이 아니면 안 될 듯이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삶’이라는 대안이 남아 있다.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에 집중하면서 누군가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지금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집중하면서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적 의지에 권능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일어서라. 자기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하라."

선하고 성실한 삶을 살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면 길을 바꾸라는 것이다. 삶의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길을 너무 자주 바꾸게 되면 오히려 길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하지만 길이 정체돼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도 길을 바꾸지 않는 것 또한 낭비다. 정체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경솔한 짓도 변덕도 아니다. 그것은 용기다.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당신의 삶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각자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목표를 달성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라. 누구도 그런 당신을 막을 수는 없다. 어떤 외적 장애물(방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로움, 자제력, 지혜로움과 함께 했다면 이런 장애물도 없앨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내 행동의 어떤 부분을 좌절시키려고 하다면? 그런 경우에는 기꺼이 그 장애물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조건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리고 즉시 대체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데에 더 도움이 되는 다른 행동을 취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32

로마의 작가 퍼블릴리어스 사이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물을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은 강이 시작되는 곳에서 건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평화로운 방향으로 안내하는 인생의 지침서 같은 것은 없다. 원칙을 가지고 운명 앞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데는 항상 두 가지 시야가 있다. 긍정과 부정.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아무리 어처구니가 없고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일에도 그 원인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감정에 휩싸여 그 원인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세상과 멀어지고 마음의 문은 굳게 닫힌다. 닫힌 문을 여는 것은 오로지 당신이 어떤 손잡이를 잡느냐에 달려 있다.

둘째, 현명한 자들은 항상 최상과 최악의 시나리오를 동시에 고려한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헛된 희망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기호에 맞춰 세상의 섭리에 대해 논평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섭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고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침묵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상태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침묵을 하게 되면 답은 스스로 찾아온다.

몸과 마음에 활력을 가져다주고 골칫거리들을 풀 수 있는 해결법은 멀리 있지 않다. 가까운 야외에 나가 한나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번 좌절했다면 스스로에게 이 정도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그러나 예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서서히 약해진다네. 결국엔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종국에 가서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2.18.31

"미치광이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매번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동일한 패턴을 유지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을 고치려 하지 않고 행동을 바꾸려 하지도 않으면서 희망만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되는가?" "이 말싸움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하지 싸우기 위해 대화를 하지는 않는다.

그는 후보자를 아침 식사자리에 초대했다. 그리고 식당 매니저에게 고의적으로 후보자의 식사 주문을 엉망으로 만들 것을 부탁했다. 후보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화를 내는가? 무례하게 반응하는가? 사소한 일로 중요한 자리를 망치는가? 우아하고 세련된 태도로 이 불편함을 다루는가? 작은 역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것은 사소한 능력이 아니다. 거기에서 모든 역량이 드러난다.

거만함을 억제하는 것도, 분노를 조절하는 것도, 심지어 배은망덕한 사람을 돌보는 것도 가능하다. 누군가는 그렇게 했다. 사소한 문제를 푸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해결책을 찾아갔다. 해법을 찾기 위해 헌신하고, 스스로를 도야하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 했다면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변명은 해결책이 아니다.

나는 훌륭한 왕이 되려면 철학적 사고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철학자야말로 처음부터 왕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무소니우스 루푸스, 강의록, 8.33.32-34

첫 번째 유형은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면 즉시 그 호의를 되돌려 받을 준비를 한다. 두 번째 유형은 그렇게 빠르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받을 채무가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다. 세 번째 유형은 자신이 베푼 행동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포도주를 만들고 난 후 다른 요구에 응하지 않는 포도나무, 경주를 마친 말, 사냥감을 쫓은 후의 사냥개, 꿀을 만들고 난 후의 꿀벌과 같다. 그와 같은 사람은 좋은 행동을 한 후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포도나무가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또 다른 호의를 베풀 기회를 기다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6

누군가 당신의 생각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어린 형제자매가 당신의 옷을 입는다든가, 당신 취향의 음악을 듣는 것으로 당신을 흉내 내는 것을 본 적은 없는가? 새로 이사를 갔는데 이웃이 따라쟁이들로 가득했던 적은 없는가? 젊고 경험이 없었을 때는 이런 상황에서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그만 좀 따라해. 내가 처음이라고!"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것, 일찍 일어나는 것 하나가 무슨 대단한 일일까 싶다. 하지만 멀리 갈 것 없이 당신의 부모님만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양육이라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몸이 아픈 날조차도 잠의 유혹을 물리쳤다.

배우고 돈을 벌고 양육을 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준다. 그것이 고통만을 주는 것이었다면 이미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이런 질문들에 고민을 하다 보면 다소 불편한 답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좋다. 질문은 교정을 위한 첫 걸음이다.

배우고 돈을 벌고 양육을 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준다. 그것이 고통만을 주는 것이었다면 이미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모든 악은 선한 인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창궐한다."

저 오이는 쓰다, 그렇다면 내다 버려라! 길 위에 가시덤불이 있다, 그러면 그곳에 가까이 가지 마라!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귀찮은 존재들은 왜 있어야 하는가?" 하지만 이와 같이 생각을 한다면 자연의 진실한 탐구자인 우리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이는 마치 목수나 구두수선공의 가게에 톱밥과 가죽 조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 그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쓰레기통이 있지만 자연은 그와 같은 것이 필요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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