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피고 발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럴 때마다 만들어내는 작은 선언 같은 문장들이 모이면 시끄러운 소리에 쫓겨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걷는 발걸음을 멈추게 해줍니다.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것들 사이에서 작아지고 흐려지는 자신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아이 없이 사는 것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도 저는 진지하게 대답한 적이 없었습니다. 얼버무리거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답만 했습니다. 그것도 말끝을 흐리면서요. ‘결혼하고 왜 아이 없이 사느냐?’라는 질문은 제게는 어렵고 부끄럽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할 때마다 다른 사람처럼 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이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 대한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아이 없이 살게 됐는지 그리고 아이 없이 사는 매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남편을 만나 평범함에서 자꾸 어긋나려는 제 모습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았습니다. 아이 없이 사는 삶에 대해 조용하고 끈기 있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 책을 썼고 새로운 문장을 완성했습니다.
‘저는 아이 없이 남편과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이 책은 저의 작은 선언문인 셈입니다.

과거에는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음으로써 맺어지는 가족만 정상으로 여겼지만 최근에는 가족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 같다. 어떤 배경으로 탄생한 가족이든 그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중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은 그렇지 않은 가족에 비해 본능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그 결집이 조금은 더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은 보통의 가족보다 더 큰 책임감으로 서로를 꽉 붙들어야 한다.

아이가 없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일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아니 왜? 왜 애가 없어?"라고 묻는다.

책 내용 정리중-> (아이 낳으려고 불임전문 병원에도 간적있음-> 남편과 아이에대한 생각이 달라 이혼함 -> 아이 없이 살자는 지금 남편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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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없이 남편이랑 둘이서 살고싶기에
궁금해서 읽어본 책인데
먼저 고양이를 키우는 상황부터 나와 다르다
5마리나 키우고 있다니 !.!
<임신하려고 노력했었고- 이혼을 했다>
이 경험도 나에겐 없는 경험이라

딩크라도
다 같지 않구나
생각하게 된다

별일 없는 듯 살았지만 세상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혀왔다는 것을. 그를 만나 안도했다.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어.’


"우리는 모두 평범하고 모두 이상하답니다. 그러니 각자의 자연스러운 삶에 집중하는 건 어떨까요?"

부부 사이에 상대방의 단점은 운동화에 들어간 작은 돌조각처럼 아프게 밟혀서 주기적으로 털어내야 한다.

아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오른손도 평소에는 나의 관심 밖 저 멀리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아무리 봐도 숟가락처럼 짧고 둥근 내 엄지발가락이 예쁠 리가 없는데, 그런 내 엄지발가락으로 보고 귀엽다고 말해줄 때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는 걸 느꼈다.

내 인생에도 간절히 사랑받고 싶었던 외로운 시간이 있었다. 마음과 마음이 마주 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고양이든 사람이든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여념이 없는 지금이 좋다.

왜 아이가 없냐는 질문은 동질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쉽게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아이 없이 살게 되는 이유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없다는 당신의 말에 반갑다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왜 아이가 없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매일 보는 고양이, 매일 일어나는 일을 천일야화라도 되는 양 말하는 남편에게 질 수 없지. 나도 입을 열었다. 소소한 이야기 배틀이 벌어졌다. 별거 아닌 일을 실컷 이야기하다 보니 어젯밤 나를 괴롭혔던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별거 아닌 걸로 느껴졌다. 이 사람과 같이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같이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동시에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사람이라 그가 좋다.

내 입장에서는 아이 없이 사는 일이 특별할 게 없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면 다르다. 미안한 일이 돼버린다. 손자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내 부모님 또래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모님의 큰 기쁨을 빼앗은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다행히 부모님은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고 강권하지 않았다. 그동안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속상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조카가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에게는 드디어 손녀가 생겼고 부모님께 더 이상 죄송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조카가 고마웠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에서 현자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책은 도끼다》 에서는 위의 문장을 인용하며 현자를 창의력 있는 사람으로 바꿔 창의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는 현자를 ‘아이 없이도 잘 사는 사람’이라고 바꾸고 싶다. 그러면 더 이상 행복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자주 경탄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나야, 나!"라고 외칠 수 있다. 시시한 즐거움과 경탄,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법을 찾았다.

사람에게 천성이 있다면 나는 확실히 게으른 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제일 좋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양이를 껴안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살짝 열린 베란다 창 사이로 풀벌레 소리까지 들려온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그렇게 누워서 온종일 보낼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자꾸 눕고 싶어서 실룩거리는 엉덩이를 의자에 꼭 붙들어 매야 한다. 여행 가서 멋진 풍경을 보는 일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도 행복하지만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읽었던 책은 아이 없는 삶에 대한 것이었다. 내 아이는 없지만 내 삶에 아이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이름을 아는 아이, 이름을 모르는 아이, 그리고 나라는 아이. 아이 없는 내 삶이지만 아이는 항상 가깝게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일정한 시간 어떤 일을 계속해나간다면 우리는 그 일에 익숙해지게 된다. 익숙해지면 결국 잘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간단한 인생의 진리를 이제야 알다니 진작 알았다면 나는 더 많은 것을 이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하지만 지금에라도 깨우친 내가 대견하다.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린다.

나이가 드는 게 신기하더라도 어떤 이들에게는 재미없는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니 늙어가는 기쁨은 되도록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요즘 세상에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 오랫동안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봐였다. 사람들이 "뭐 하세요?"라고 물어볼 때 한 단어로 된 직업을 바로 댈 수 있는 것

매달 월급을 받는 일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었다. 직장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버리고 나를 설명할 이름을 잃었다.

꼭 무언가가 돼야 한다면 나는 시인이 되겠다. 마음에 담은 것들을 소중히 기억해 글과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순간 나는 나의 쓸모를 확신했다.

"나중에 아이 없는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꽤 여러 번 들었던 말 앞에서 나는 진짜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맞을 아이 없는 겨울이 두려웠다. 추운 겨울 굽은 등으로 혼자 걷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 말이 피할 수 없는 저주처럼 느껴졌다.

인생의 끝에서 자식을 갖지 않는 걸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도 잠자코 웃기만 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지금이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의 저주는 반사하겠어요."

인생의 끝에서 내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아이의 유무에 따라 흔들리는 삶이 아니다. 내 안의 진실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지, 매일을 얼마나 충실하게 보냈는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주 웃고 계절을 온전히 느끼고 내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저 오이는 쓰다, 그렇다면 내다 버려라! 길 위에 가시덤불이 있다, 그러면 그곳에 가까이 가지 마라!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귀찮은 존재들은 왜 있어야 하는가?" 하지만 이와 같이 생각을 한다면 자연의 진실한 탐구자인 우리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이는 마치 목수나 구두수선공의 가게에 톱밥과 가죽 조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 그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쓰레기통이 있지만 자연은 그와 같은 것이 필요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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