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남은 사람들>>
-싱귤래리티 3부작

세계 각국에서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살인인지아닌지 판단하기 위한 소동이 벌어졌다. 업로드된 인간이 한 명 생길 때마다 생명을 잃은 육체 한 구가 남기 때문이었다. 파괴적 스캔과정을 거친 두뇌가 피투성이 곤죽이 된 채로, 하지만 실제로 무슨일이 벌어진 걸까? 그 인간에게, 그의 본질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그의 ‘영혼‘ 에게?
- P206

인류는 세상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중이었다.
- P207

엄마가 손을 뻗어 아빠의 손을 잡았다.
"안 돼. 그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 현실 세계를 포기하고 시뮬레이션이 되기를 선택하는 순간, 그 사람들은 죽어. 죄악이 존재하는 한 죽음도 존재해야 해, 삶이 의미를 얻는 수단이 바로 죽음이니까." - P207

하지만 엄마는 바르게 사는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르게 죽는길도 - P207

요즘 들어 그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 어쩌면 망자들이 드디어 우리를 포기하고 다음 세대에게 마수를 뻗치는 중인지도 모른다. 우리 미래에게, 아버지로서 나는 루시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위험으로부터 그 아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 P208

두 약탈자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위협하는 소리를 냈지만, 브래드와 내가 총을 겨눈 탓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앙상한 팔다리가 지금도 생각난다. 지저분한 얼굴도, 증오와 두려움으로 얼룩진핏발 선 눈도,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의 주름투성이 얼굴과 하얗게센 머리가 잊히질 않는다. 약탈자들도 늙는구나. 그때 내가 떠올린생각이었다. 그리고 저자들한테는 아이도 없겠지. - P211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기술을 그대로 사용한거야. 점토를 파낸 곳도 증조할머니가 흙을 파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 사람은 오래된 전통의 생명을 이어 가는 중이야. 삶의 방식을..

- P212

"그냥 장사에 도움이 되라고 지어낸 이야기야." 운전석에 앉은 아빠가 뒷거울로 나를 보며 한 말이었다. "그런데 사실이라면 더 슬픈이야기지. 만약 우리가 선조들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방식은 이미 죽은 거고, 우린 화석이 됐다는 뜻이니까.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 주는 공연 같은 거지."
"그 여자는 공연 같은 거 하지 않았어. 당신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게 뭔지, 지켜야 할 가치가 뭔지 하나도 몰라, 인간으로 살기위해선 진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 P212

저 아이들의 연애에는 순진함 같은 것이 있다. 내가 어릴 적에는없었던 것이, 텔레비전과 진짜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던 성적자극이 없는 지금,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더 길게 누린다.
- P213

"안 돼." 엄마는 숨을 쌕쌕거리며 말했다. "약속해라. 이건 중요한문제야. 나는 이제껏 진짜 삶을 살아왔어, 그래서 진짜 죽음을 맞고싶어. 전자 기록으로 변하는 건 절대 사양이야. 그건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이니까."
- P214

"만약 업로드를 택한다고 해도, 당신한테는 아직 선택할 기회가있어. 일단 해 보고 나서 마음에 안 들면 의식을 동결시켜 달라고 하면 돼, 아예 지워 달라고 해도 되고, 하지만 업로드를 안 하면 당신은 영원히 사라져 버려. 그땐 후회도 번복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만약 당신 말대로 하면 나는 정말로 사라져 버려. 다시는 여기로돌아오지 못해, 진짜 세상으로, 난 전자 무더기로 시뮬레이션 되고싶진 않아."
"제발 그만해요." 로라 누나가 아빠에게 애원했다. "엄마가 아빠때문에 괴로워하잖아요.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요." - P214

"선택은 엄마 몫이에요, 아빠가 아니라!" - P215

"난 이제 너희 엄마 곁으로 갈 거다. 너희도 얼른 따라와라."
"엄마는 아빠가 죽였잖아요."
내 말에 아빠는 흠칫했고, 나는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 P216

우리는 예전의 삶에서 되도록 많은 것을 보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오래된 연극을 상연하고, 오래된 책을 읽고, 유서 깊은 명절을축하하고, 오래된 노래를 부른다. 포기해야 했던 것도 많았다. 전통조리법은 부족한 재료로도 만들 수 있게 고쳐 적었고, 낡은 소망과포부는 좁아진 땅에 맞게 쪼그라뜨렸다. 그러나 부족한 점 하나하나는 우리 공동체를 더 단단히 결속시켰고, 그 덕분에 우리는 전통을 더 철저히 지켜 왔다. - P216

루시는 훌륭한 재봉사다. 솜씨가 캐럴보다 훨씬 낫다. 모든 아이들이 내가 자란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갖가지 기술에 능숙하다. 뜨개질, 목공, 원예, 사냥 같은 일에, 캐럴과 나는 이미어른이 된 후에 변해 버린 세상에 적응하느라 책을 보며 그런 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지식의 전부였다. 아이들은 새 세상의 원주민이다. - P217

우리 엄마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진짜 엄마는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토록 엉망진창인 세상에서도 살아가고자 애쓰는 진솔함이었고,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에게 가까워지고자하는 갈망이었고, 우리 육체가 겪는 고통과 수난이었다.
- P219

엄마는 삶에 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인 거라고 가르쳐 주었다. 저마다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이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를부여한다고. 우리는 죽음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우리 아이들을 통해 우리 안의 일부가 계속 살아간다고, 그것만이유일한 형태의 진정한 불멸이라고, - P220

오로지 이 세상뿐이다. 우리가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세상, 우리를 붙들어 놓고 우리에게 존재하라고 요구하는 세상은, 컴퓨터가만들어낸 환상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풍경이 아니라. - P220

 발전기가 계속 돌아가게 유지하는 방법을, 서로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모습을, 오래된 책들을 복원하고 낡은 일상을 지켜 가는 광경을, 이 세상에는 아직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불길처럼 살아서 타오른다는 것을, 죽는 사람은 분명 있었지만, 새로 태어나는사람도 있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유쾌하고, 즐거운, 진짜 삶이.
- P221

"믿음을 잃은 사람한테만 거짓 놀음으로 보이는 거야."
"믿음이라니, 도대체 뭘 믿는다는 건데?"
"인간성에 대한 믿음.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한 믿음." - P223

"내가 당신 곁에 남을게." 캐럴이 말한다.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거야.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으니까. 하지만 루시는 어려. 그 애는 새로운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어."
- P226

나는 루시가 내 어머니를 얼마나 닮았는지 문득 깨닫는다. 어머니의 생김새가, 나를 거쳐, 내 딸에게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이 살아가는 본래의 방식이다. 조부모, 부모, 자녀, 각각의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길을 양보하고 물러나며, 미래를 향하여 끝없이 분투하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 P228

나는 일찍이 선택의 기회를 빼앗겼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인간답게 죽을 기회를 박탈당한 어머니, 망자들에게 삼켜지고 만 어머니,
망자들의 쉬지 않고 반복되는, 정신이 아닌 기록의 일부가 되어 버린 어머니를 그 어머니의 얼굴이 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딸의 얼굴에 겹쳐진다. 내 귀엽고 천진하고 어리석은 딸, 루시의 얼굴에. - P229

캐럴이 말없이 내 곁에 앉는다. 나는 아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꼭 끌어안는다.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어 주면서, 아무 말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둘러본다. 이 순진무구한 세계를, 망자들에게서 물려받은 정원을.
세상에 남은 시간은 모두 우리 것이다 - P230

<<곁>>

잠깐 동안, 당신은 간병인이 당신 어머니를 다루는 방식에 충격을 받고, 뒤이어 궁금해한다. 어머니의 머릿속에 드리운 안개 너머로 손을 내미는 방법이 정말로 저것뿐인지를, 지금 당신의 반응이혹시 미국식으로 섬세해진 감성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것, 더 암울한 것, 간병인은 저곳에 있는데 당신은 대양 건너 이곳에머물 수밖에 없는 사연이 낳은 것인지를.
- P235

그러나 냄새는 당연히 느껴지지 않는다. 젖은 기저귀도, 무력한어머니의 수치심도, 소독약과 부패와 죽음의 냄새도 당신은 감지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처한 조건의 물성은 당신의 후각 세포를 감싼섬세한 막에 닿지 않는다. 문명이란 죽음이라는 현실로부터 우리를보호하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해지는 거짓말을 쌓아 가는 과정이다.
당신은 여전히 드넓은 대양의 건너편에 있다. - P236

본인도 자기 자녀들 손으로 이곳에 버려진 채 기계에 구현된 유령의 모습으로만 그들을 만나는 주제에 당신한테 핀잔을 준다고 쏘아붙이고 싶다. 당신과 당신 아이들이 낯설고 머나먼 땅에서 기회로가득한 삶을 누리기를 바란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는 점을,
꼭 언급하고 싶다. - P237

이 로봇은 죄책감을 덜어 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너무 멀리 살고 핑곗거리도 너무 많은 이들을 위하여, 어머니 곁의 당신이 본질적으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기술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 P239

어머니가 어젯밤에 잠드셔서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이제 밤마다 어머니한테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당신은 서랍장 위 거울에 비친자신의 얼굴을 외면하고 만다.
- P239

당신은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을 상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기묘한지 생각한다. 실제로는 이미 몇 년 전에 그 사람을 떠나보내으니까. 그때 일은 너무도 천천히 일어난 탓에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 P240

 당신은 어떻게 수많은 작은 결정들이 쌓여 돌이키지 못할 변화를 일으키는지, 어째서 결심하지 않는 것이 결심하는 것과 똑같은지를 생각한다. 당신에 관해 눈곱만큼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당신이 정해진 방식대로 행동할 거라 기대하는지를 생각한다.
- P240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순록떼가>>
-싱귤래리티 3부작

나는 아직 어려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지 못하지만, 부모님이 주신 세계가 있어서 아주 행복하다.  - P245

나는 생각으로 세라에게 화답한다. 내 부모님 여덟 분이 나한테자신들의 일부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지만, 그 부분들이 변화하고 재결합하여 이루어진 나는, 여덟 분 모두와 다 다르다.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는 가계도를 만들고 혈통을 추적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고대인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내 가계도는 엄청 간단한데 왜냐면 나는 부모님이 여덟 분밖에 안 계시고 그분들 각각의부모님은 훨씬 더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라는 부모님이 열여섯분이나 되고 그 윗대로 올라가면 훨씬 더 바글바글하다.
- P247

엄마는 싱귤래리티 이전의 사람, 고대인이다. 고대인은 온 우주를통틀어 수십억 명밖에 안 된다. 엄마는 업로드를 하기 전에 육체를지닌 채 26년간 살았다. 엄마의 부모님은 딱 두 분인데 끝내 업로드를 안 하셨다. - P249

남은 삶동안 로봇 속에 갇혀 있는 엄마를 낯선 세계에서 
녹슬고 부패하다가 망가질 로봇 속에, 우리 엄마는 죽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겨우 45년 남은 거네요."
내가 생각한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인다.
45년이라는 시간은 생명의 자연적 길이에 비하면 눈 깜짝할 새다. 그러니까, 영원에 비하면,
- P253

"르네, 그것들은 똑같지 않아. 수학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상상계의풍경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지만, 그건 실제가 아니야. 가상의 실체에 대한 영원한 통제권을 손에 넣으면서 인류는 무언가 잃어버렸어. 안으로만 눈을 돌리다 보니 현재에 만족하게 된 거야. 우리는 별들과 저 우주 바깥의 세계를 잊어버렸어." - P254

"긴 여행이 될 거야. 그래도 해 볼 가치는 있어. 당신은 르네랑 영원히 함께할 거잖아. 난 그저 나한테 남은 시간의 극히 일부를 애랑같이 보내고 싶을 뿐이야." - P257

나는 그 이미지들을 즐겁게 만끽하지만 이내 그러면 안 된다는생각이 든다. 그래 봤자 엄마는 끝내 떠나 버릴 것이고, 나는 끝내엄마한테 화를 낼 테니까. 엄마는 비행하는 게 너무 좋아서 떠나려는 걸까? 물질세계가 주는 이 감각이 좋아서? - P259

나는 우리 아래로 지나가는 세상을 내려다본다. 전에는 겨우 3차원밖에 안 되는 세계는 납작하고 지루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않았다. 이곳의 색채는 내가 지금껏 보았던 어떤 색보다 더 생생하고,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아름다움이 곳곳에 무작위로 깃들어 있다. 하지만 일단 내 눈으로 이 세계를 봤으니까 나중에 아빠랑 같이수학적으로 재창조해 볼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재창조된 세계는 전혀 다르지 않은 느낌이 들 것이다. 나는 이 생각을 엄마와 공유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게 진짜가 아닌 걸 알잖아." 엄마가 생각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게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
나는 의식 속에서 엄마의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 P259

엄마의 생각에서 끝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 가운데 하나지, 르네, 인간의 피조물은 그 어떤 것도 영원토록 남지 못해, 데이터 센터조차도 우주가 열역학적 사망을 맞기 전에 언젠가는 산산이 무너질 거야. 하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남는 법이야. 실체를 지닌것은 모두 죽을 운명이라고 해도." - P263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45년이 흘렀다. 내가 보기에는 기껏해야 하루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았는데 - P263

"르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이 아이 이름에 ☆을 넣은 건, 언젠가당신이 별들을 향해 떠나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야. 난 사람들이 꿈을 실현시키도록 돕는 데에 소질이 있어. 하지만 당신의 꿈은 내가대신 만들어 줄 수 없는 거였지. 소피아, 안전한 여행을 하길 빌게."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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