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가 영리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단지 삶을 이어가는 데에 필요한 실용적이고 자질구레한 부분에 신경을 안 쓸 뿐이었다. - P170
늙어 가다 보면 사람은 점점 파충류와 비슷해진다. 아침에 햇볕을 흠뻑 쬐지 않으면 돌아다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베스가 들를 때 인공 태양등을 사다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겨울 아침에는 볕을 쬐기가 힘드니까. - P171
오늘 아침은 화창하다. 오늘처럼 따뜻한 날은 나뭇잎에게 축복이다. 광합성을 통해 차오른 당(糖)을 차가운 밤공기가 잎 속에 가둔다 - P171
이제 어쩌면, 나를 위한 꽃은 내 코밑의 이 꽃이련만 나 어찌 가려낼까. 카르타고의 장미 그 향을 맡아 본 적 없이 ?
리즈는 나한테 쓰는 엽서에 시를 즐겨 인용했다. 이 구절은 나도안다. 지은이가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리즈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니까. 리즈는 어릴 적에 이 시를 곧잘 암송하며 여행에 나설 날만을 고대했다. - P173
"생존용품 중에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양말이야." 리즈는 짐을 싸면서 내게 말했다. "히치하이킹을 할 땐 발바닥이 폭신한 양말을 신는 게 아주 중요해, 왜냐면 엄청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것말고도 양말은 쓸모가 많아. 예를 들면, 마실 물을 정화하는 필터로사용한다거나." - P174
"그래서 하나도 안 위험하다는 거야. 언니,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 P174
나는 리즈의 단순하고 황당무계한 논리에 할 말을 잊었다. 동생머릿속에 상식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욱여넣고 싶은 마음이 내게 없었다면, 나는 아마 웃어 버렸을 것이다.
리즈의 근거 없는 낙관이 잘 풀리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일상생활에 서툰 것처럼 보이는 리즈의 결점들이 어떻게 장점으로 변하는지를 이미 몇 번이나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 P175
리즈는 남들의 친절에 기댔다. 사람들은 저절로 리즈에게 끌렸다. 그 애한테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 P175
나는 부러웠다. 리즈의 무모함이, 자기 삶을 상대로 원하는 것을당당하게 요구하는 자신감이 더 어릴 적에 우리는 둘 다 학업 성적이 좋았고, 특히 과학에 소질이 있었다. - P175
그러나 성격은 서로 딴판이었다. 나는 2년 과정인 전문대학을 마치고서 확신과도 같은 체념에빠졌다. 내가 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남 앞에 서기를 두려워한다는. 그래서 집에 들어앉아 식구들이 행복해지도록 돌보며 세상이 나를빼고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에 만족한다는 체념이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과수원을 물려받을 사람도 있어야 했고, - P175
"근데 언니, 그거 알아? 제일 중요한 생존용품은 양말이 아니었어. 그건 우리 몸이야." 내 동생이 드디어 실용적인 삶의 지식을 하나 배웠구나, 그때는그렇게만 생각했다. - P177
어차피 홍옥은 그냥 먹기에 좋은 사과는 아니다. 맛이 너무 시어서. 그래도 나는 홍옥이 제일 좋다. 매킨토시종을 비롯한 생으로 먹기 좋은 사과는 입으로 맛을 보게 마련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과육이 말 그대로 녹아내리듯이 목으로 넘어가니까. 그런 반면에 홍옥은, 온몸으로 맛을 음미한다. 단단한 과육은 깨물면 턱이 얼얼하고, 아삭거리는 소리는 두개골에 부딪혀 메아리치고, 시디신 맛은 헛몸을 타고 넘어 발끝까지 퍼져 나가니까. 홍옥을 먹을 때면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 느낌이 난다. 세포 하나하나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아아, 이거야, 더 줘, 부탁이야.‘ - P178
내 생각에 몸은 저 나름의 지능이 있다. 정신은 결코 하지 못할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줄 아니까. - P178
심지어 리스프와 프롤로그 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기까지 했다. 실력이 쑥쑥 느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아아. 내가 이렇게 내성적이지만 않았어도!). 그 언어로 프로그램을 짜는 과정에는 일종의 유기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꼭 파이를 굽는 것처럼. - P179
"여행은 말이야." 리즈가 말했다. "우리 정신을 업그레이드하는과정일 뿐이야. 내가 하는 일은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는 거고, 그러니까 내 삶은 곧 수많은 정신과 만나는 과정인 거야." - P180
석양빛 속에서 리즈는, 왠지 벌거벗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 같다. 장신구에 내장된 스마트 거울이 얼굴과 팔에 젊어 보이게 하는 빛을 쉬지 않고 미세하게 비춰 주다가 이제는 꺼졌기 때문이었다. 거울이 켜져 있는 동안 리즈는 열아홉 살처럼 보였다. 거울이 꺼지자서른다섯 살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벌거벗은 리즈가 더 예뻐 보였다. 거울을 끈 상태의 리즈가. - P182
나는 리즈를 꼭 끌어안았다. 리즈는 양팔을 허리 옆에 축 늘어트린 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게 기대기는 했다. 그 애는 어릴적에도 그러곤 했다. 내 힘이 그 애를 안아 들 만큼 셌다면, 두 팔로그 애의 몸을 감싸고 그 애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불어넣어 줄 수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P184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리즈가 어떤 기분일지 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았으므로, 내 본능으로는 내 몸으로는, "있잖아, 몸은 실제로 제일 중요한 생존용품이긴 한데, 약하고 불완전해, 몸은 결국엔 우릴 버리게 마련이야." - P184
나는 노년이 되면 여행을 하며 살 거라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행은 젊은이를 위한 것이니까. 나이를 웬만큼 먹어서까지 여행에 나서지 못한 사람은 나 같은 꼴이 되고 만다. 태어나 자란 곳에 뿌리를 내리고 붙박이는 것이다. - P184
가끔은 나도 궁금할 때가 있다. 만약 내가 여행을 다녔다면, 리즈처럼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면, 내 정신의 물리적 윤곽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랬더라면 언니는 지금쯤 완전히 다른 하드웨어에서 실행되고있을 거야." 리즈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제 업그레이드 할때도 됐겠네. 자, 코트디부아르로 가 볼까." - P185
우리한테 필요한 건 지도야. 우리가 유일하게 보유한 제대로 작동하는 정신의 플랫폼, 바로 우리 정신 자체의 청사진 말이야.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우리는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아직도 알지 못해, 엠아르아이 (MRI) 검사, 초음파 사진, 적외선 촬영, 심지어는 사망 후에 냉동된 두뇌를 해부까지 해 봤지만, 아직은겨우 겉핥기 수준이야. 우리는 살아 있는 두뇌를 역설계하는 수밖에 없어. 두뇌를 조각조각 분해한 다음, 다시 조립해야 해. 그래야우리 손으로 정신을 창조하는 방법을 진정으로 깨우칠 수 있어." - P187
귀퉁이까지, 가장 사소한 신경 연결체 하나까지도. 그러고 나서 맨먼저 할 일은 내 두뇌의 복사본을 만드는 거야, 실리콘으로, 그렇게하면 나는 다시 살아나, 차이가 있다면 내가 전보다 10억 배 더 빠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더 이상 늙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왜냐면 나한테는 이제 몸이 없을 테니까. 그 일을 다 해내면 앞으로는 아무도 죽지 않아도 돼. 이 연약한 육신이 우리 감옥이 아니게되는 거야. 그렇게 우리는 우리 숙명을 완수하는 거야." - P189
"만약 실패하면?" "직접 부딪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잖아, 안 그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이미 다 마쳤어. 만에 하나 실패한다고 해도, 아주 멋진 여행이 될 거야." - P189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리즈는 다시 여행에 나서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고, 그 여행길에 가져가도록 내가 쥐여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번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챙겨 줄 수있는 것은 리즈의 몸뿐이었다. 그 애가 머잖아 남겨 두고 떠날 몸. 내 동생은 드디어 영영 떠나 버릴 작정이었다. - P189
암흑 속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고정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심지어 자신의 손가락도 발가라도, 호흡을 위해 노동하는 폐의 움직임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끝날 기약이 없는 시간 동안 함께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뿐이라고, 통 속에 든 두뇌는 끝내 미쳐 버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몸이었다. 결국에는, 리즈는 자신의 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 후에, 곧바로, 정신에서도 벗어났다. - P191
6.만조
"내가 어릴 적에는." 아빠가 말한다. 나직이 웃으며, "달이 너무조그마해서 내 주머니에 들어갈 줄 알았단다. 동전처럼." 얘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밀물이오고 있으니까. - P197
"우리는 왜 안 떠나요.?" 언젠가 내가 아빠에게 물었다. 딱 한 번. "엘로디." 아빠는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답했다. 햇빛으로 물든 바다의 냄새를 바람이 실어다 줄 때면, 나는 네 엄마 머리에서 풍기던 향기를 들이마신단다." - P198
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밀물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아빠가 탑을 세우기로 마음먹은 자리 근처에서. "밤에 바닷물 속에서 해파리의 빛이 깜박거릴 때면, 네 엄마의 반짝이던 눈이 보여, 파도가 우리 탑에 부딪혀 부서질 때면 네 엄마가부엌에서 냄비를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들리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떠나겠니? 네 엄마가 저 바다의 일부가 돼 버렸는데." - P199
사랑이 아빠를 묶어 놓았다. 엄마에게, 저 끈질긴 밀물에게, - P199
우리 탑의 높이가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대성당의 첨탑과 비슷해졌을 무렵, 지구에 남은 사람은 몹시도 적었다. 아직 남아 있던 이들은 밀물 때면 섬으로 변하는 산악 지대의 여러 도시에 옹기종기모여 살았다. 그러고도 날마다, 떠나는 사람의 수가 늘어 갔다. - P199
몸이 성한 청년은 이름이 뤽이었는데,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진 자기 동생파스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용감하시던데요." 내가 말했다. 쳐들어오는 밀물에 대비하여 문을 잠그고 나서. "별 말씀을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버리고 가겠어요. - P200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유대감을 느꼈다. 그것은 중력처럼 단단했다. - P201
"펠레티어 박사님, 달이 왜 갈수록 점점 커지는 건가요?" 사람들은 목을 쭉 뻗고 아빠한테 그렇게 물었다. 국지적 중력 상수와 궤도 와해, 또는 수많은 기호와 숫자로 이르어졌으나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차가운 방정식을 들먹이며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아빠는 그저 잠시 가만히 서서 빙긋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 달이 지구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입맞춤을 하고싶어서 가까이 다가오는 거죠." - P198
"때로는 사랑이 지나쳐서 탈일 때도 있지. 저 달이 지구를 사랑하는 것처럼." - P201
하지만 나는 집에서 분리된 공간에 있다. 내 우주선, 그렇다. 이우주선은, 외계로 향하고 있다. 달이 아니라. "안돼." 나는 악을 쓰며 창문을 두드린다. 아빠는 내가 혼자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빠가 아는한 나에게 미래를 줄 방법은 억지로 떼어내는 것뿐이었다.
- P202
나는 눈을 감고 아빠의 칼 모양 집이 달에 명중하기를 기다린다. 질량이나 운동량, 속도 같은 것은 떠올릴 겨를도 없이, 나는 수백만조각으로 부서지는 달을 상상한다. 날카롭고 삐죽빼죽한 조각 하나하나가 달콤하고, 묵직하다. 사랑처럼,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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