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리의 존재라는 것이 어쩌면 파동이겠구나!

누군가와 통한다는 것을 "쟤랑 나랑은 코드가 맞아, 주파수가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관계라는 것은 파동의 만남이고 그 파동이 서로 박자를 맞추어가는 것이, 우리가 한 사람과 긴 길을 오랫동안 걷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그런 모양새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마음에 부등호를 붙일 생각은 없다. 이 둘은 맞닿아 있는 듯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빚어내는 감정이며 그저 ‘좋아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지 잊지 않길 바랄 뿐이다

연인 사이에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건 빈 곳이 느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이곳이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서로를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실망이라 함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한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상한 마음’이 아니라 ‘바라던 일’이다. 실망은 결국 상대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기대를 한, 또는 속단하고 추측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고유의 모양으로 존재하는데,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렇다. 나의 경험치와 취향, 태생적 기질 등이 빚어낸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볼 수밖에 없다

어디에나 맞는 만능 퍼즐조각이 없듯, 이렇게 각자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우리는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완벽하지 않다.

때로 기대는 실망을 낳고, 오해나 편견이 호감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오래된 관계는 이 두 감정이 교차, 반복되다가 찾은 평균점 같은 것이 아닐까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자.’ 미움받을 용기까지는 없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나의 인생관이다.

결정적으로는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그 사람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거죠. 그때 느끼는 벅참이 있잖아요. 저도 그럴 때 벅참을 느끼는 거 같아요. 함께 있기만 해도 나를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순간 비로소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또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감정이 느껴지더라고요

당신 곁의 수많은 거울들을 떠올려보라. 어떤 거울 앞에서 나는 가장 괜찮은 사람이었는가?

소중한 사람일수록 잘 바라보아야 한다. 세심히 살펴야 한다. 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최소 한 발자국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당연히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 관계는 V3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가 된다

다시 말해 ’나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야’라고 알리는 행위가, 선을 긋는다는 의미이다.

간단하게 지도를 떠올려보자. 꼬불꼬불한 선으로 나뉘어 있는 수많은 국가들은, 선이 있다고 해서 서로 단절된 관계들은 아니다. 한 예로 유럽의 경우 각국의 법령, 풍습, 기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차이들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지키기 위한 테두리로 그려져 있지 않은가

사람의 감정에도 시차가 있다. 감정이 빠르게 익는 금사빠가 있는 반면, ‘사랑’이라는 말에 걸맞을 만큼 달궈질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연애는, 두 우주가 만나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우주다.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선, 덜 구체적이고 넓은 테두리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착각.

그러나 ‘종이 변태’ 에피소드나 〈저녁하늘〉 일화를 통해 내가 배운 건, 공감은 오히려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공감은 기억이 아닌 감정에서 나온다. 즉 상황의 싱크로율이 같지 않더라도, 심지어 전혀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디테일한 설명이 사람들의 내밀한 기억을 자극해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공감을 사는 일인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감정서랍이 있다.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질지라도, 그때 느낀 감정들은 어딘가에 저장이 된다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은, 잦은 빈도로 누군가를 향한 비난을 내포한다.

그런 이들의 "걔는 이해가 안 가"라는 말을 벌거벗기면 결국 그 말은 ‘걔는 잘못됐어’ 또는 ‘걔는 이상한 애야’라는 의미더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이 목구멍에 걸릴 때, 한 번쯤은 삼키고 생각해보려 한다. 이것이 물음표, 즉 의아함인지 아니면 비난의 느낌표인지. 그리고 내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상황이 내가 서 있는 위치, 다시 말해 나의 관점 때문은 아닌지.

이렇게 나의 관점을 의심하면 또 다른 관점으로 어떤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확실히 나의 세계를 확장하거나 견고히 해주었다

명확히 어른만의 언어인 말이 있다. ‘속이 보인다’는 말이 그렇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나의 촉으로, 또는 나의 경험치로 알 수 있는 것들을 퉁쳐 표현하는 말인데 아이들에게서 이 말이 잘 쓰이지 않는 건 아이들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일 것이다.

가급적이면 좋은 걸 더 많이 보는 사람은, 아마도 안에 좋은 게 더 많은 사람일 테다.

인간에게 ‘객관적’ 시각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나의 좋은 면에 투영시켜 좀 더 나은 세상을 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어느 정도의 뒷담화는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벤틸레이션(ventilation: 환기) 역할을 해주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대놓고 말하긴 뭐할 정도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부적절한 것들에는 중독성이 있으며 중독성이 있는 것들은 습관이 된다는 사실이다.

일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핸드폰을 확인하는 일은 고역이다. 오전에 와 있는 문자들은 대체로 반가운 소식이 없다. 나랑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이들은 오전에 문자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과는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는 ‘행위’이지만, 억울함과 분노는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하다’라는 말은 말꼬리가 길수록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말은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심어두는 거라는 깨달음을 준 누군가에게 다시 한 번 고개 숙이며.

다정한 사람들은 말수가 적다

누가 굳이 뭐라 하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자기혐오의 순간을 겪는다.

못나고 부족한 것들이 크게만 보이는, 멘탈 면역력이 바닥을 치는 어느 밤. 악플 잠복균은 온몸에 두드러기처럼 올라온다. ‘어쩌면 그 사람 말이 맞을지 몰라’로 시작되는 자기의심은 대단한 속도로 혐오까지 달려간다

비난을 듣고 나면 처음엔 분개하고 방어하지만, 마음이 약해지는 날에 자꾸 스스로에게 화살을 쏘게 되는 비난의 말들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악플의 내용은 잊힐지언정, 아팠던 기억은 남는다. 내가 친 바닥의 차가운 느낌은 선명히 떠오른다.

그래서 악플은 ‘표현의 자유’라는 알량한 말로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약해진 순간,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태에 숨통을 조여오기에.

혹시 악플에 상처받는 이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본 적이 있다면, 좀 더 요란스럽게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말들을 써보기를 부탁한다.

그 한마디가 어쩌면 소중한 그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돈이 아니더라도 거스름돈과 닮은 것들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라 함은, 돌아서 빈자리를 한 번 더 보는 사람이다. 구차해짐을 불사하고 생략되어도 무방한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는, 따스함이 있는 사람이다. 이는 아무도 캐치해주지 않는 나의 미세한 상처에 안부를 물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어쩐지 마음에 난 상처도 그럴 것 같다. 곳곳에 움츠러든 곳이 있는 사람들은, 귀신같이 서로를 알아본다. 상처가 하나도 없는 사람보단 나본 사람들이 훨씬 많기에, 우리는 저마다의 빅데이터에 근거해 상대를 대한다

선물이 선물인 이유는 바로 이 포장에 있는지도 모른다. 물건의 정체성은 그저 쓰임에 있다. 그러나 포장이 됨으로써 비로소 물건은 단지 물건이 아닌, 주는 이의 마음이 담긴 무언가로 탄생한다

일례로 조언이라는 게 그렇다. ‘선의’로 건네는 말이니 듣기에 조금 거슬리거나 아파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들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조언을 하는 자의 편만을 드는 이야기다. 진심의 ‘선의’란 게 있다면, 자신의 의도를 이런저런 표현을 동원해 정성스레 ‘포장’해 전달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하물며 몸에 좋다는 쓴 약도 캡슐에 담아 삼키는 마당에, 말에도 그만한 정성은 들여야 할 것이다

남녀노소를 떠나 내가 좋아하는 부류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염치’의 유무다.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다. 나이가 들어가며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염치’다

소중하다의 ‘소(所)’는 ‘~하는 바’, ‘~하는 것’ 등의 의존명사 역할을 하고 ‘중(重)’은 말 그대로 무거움을 뜻한다. 무거운 것을 손으로 받쳐 들려면 자연히 두 손을 쓸 테고 그 무게감 때문에 온 힘이 이것을 잘 잡고 지키는 데 쓰일 테니, 소중한 것을 가진 자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꽃을 보고 드는 반가운 마음은 이것이 곧 시들 것을 알기 때문이고, 청춘을 예찬하는 이유도 쏜살처럼 빨리 사라져버림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떠나기에, 하루하루는 소중하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같이 이별에 가까워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개인으로의 매력을 유지하는 남녀의 공통점으로 ‘부끄러움을 잃지 않는 점’을 꼽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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