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문자가 없어서, 약속을 맺을 일이 생겼을 때큰일이면 굵은 줄로, 작은 일이면 가는 줄로 약속의 많고 적음에 따라매듭을 묶었는데, 각자가 이를 세어 보는 것만으로서로 비교함에 부족하지 아니하였다.
- P109

신령들은 우리에게 장난치기를 좋아한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역사에 기록된 난족(族) 사람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한 치 앞조차 내다보지 못하는, 사실상 장님이나 다름없는 인간이다.
- P109

상인: 파
미국인 : 토무
무당: 루크

난족

소에보

그런데 토무는 행동거지가 도피 중인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스스럼없이 떠들며 사람이든 동물이든 벙글벙글 웃는 낯으로 대했다. 걸핏하면 마을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꼼짝 않고있으라고 부탁하고는 조그마한 금속 상자를 자기 눈앞에 대고 손가락으로 눌러 ‘찰칵‘ 소리를 내기도 했다.  - P111

우리 난족은 수천 년 동안 이 산에서 살았다. 마을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책들, 즉 몇 세대에 한 번씩 새 삼줄로 새 매듭을 지어 베껴 쓰는 그 책들을 보면 우리 부족의 기원을 알 수 있다.  - P112

손님들은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를 더 좋아해요.
그런 사연이 마음에 들어서 더 비싸게 사는 거라고요. 상인들이 하는 말을 진실로 믿었다가는 큰일이 나는 법이다.
- P113

사방에서 날씨가 이상해졌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북쪽의 중국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저 남쪽의 이라와디강 유역에는 태풍이 부는식으로요. 이유야 뭐, 누가 알겠어요? 날씨란 게 원래 그런 건데."
- P114

"이 사람은 병을 연구하고 단백질이란 걸 발명해서 치료하는 일을 한대요. 단백질은 무슨 약 같은 건가 본데, 되게 복잡해서 잘 모르겠어요. 아픈 사람을 직접 만나거나 약을 짓지는 않는대요. 그냥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만 제시한다는데요 - P115

"이 사람은 매듭 문자라는 걸 처음 봤대요." 파가 통역해 준 말이었다. 그 줄로 만든 책을 어떻게 읽는지 알고 싶다는데요."
- P115

모양새는 다들 제각각이었지만 잉크로 적은 글자들은 내게하나같이 생기 없고 밋밋하고 추해 보였다. 우리 난족은 글자를 적지 않았다. 그 대신 매듭을 묶었다.
- P116

그리하여 말은 실체와 형상을 부여받는다. 줄을 더듬어내려가다 보면 매듭을 묶은 이의 생각이 손끝에 느껴지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뼛속에 전해진다.
- P116

그러나 손의 촉각은 일찍부터 민감해서 아이였을 적에이미 아버지에게 서로 다른 줄과 매듭의 성질을 빨리 깨우친다는칭찬을 들었다. 내게는 매듭이 줄의 탄성을 변화시키는 방식, 그러니까 조그마한 매듭 하나하나의 힘이 줄을 밀고 당겨서 책의 형태를 완성하는 방식을 머릿속에 그리는 재능이 있었다. 난족 사람은누구나 매듭을 묶을 줄 알았지만 매듭 하나가 완성되기도 전에 줄의 최종 형태를 내다보는 눈을 타고난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 P117

내가 처음 맡은 일은 필경사였다. 가장 오래되어 너덜너덜하게해진 매듭 책을 골라 매듭의 배열을 촉감으로 암기한 다음, 새 삼줄로 똑같이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매듭 하나하나의 꼬인 방식을 충실히 복제하다 보면 결국에는 줄이 저절로 똬리를 틀어 원본과 똑같은 복제본이 만들어지고, 이로써 마을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과거의 목소리를 느끼고 그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 P117

"아버지한테서 배웠어요.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배웠고, 매듭글쓰기는 조상 대대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거랍니다. 내가 풀어서 다시 묶은 매듭 책만 1000권은 될걸요. 줄이 어떻게 묶이기를바라는지, 나는 뼛속에서부터 느낄 수 있어요."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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