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천만에요, 공짜 점심은 있습니다 / 이원재 2020-11-03
며칠 전 이 지면에서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장의 ‘기본소득, 공짜 점심은 없다’는 글을 접했습니다. 모두에게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그 글에서는 ‘공짜 점심’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현실에서 누가 공짜 점심을 즐기고 있으며 누가 고통스럽게 점심값을 내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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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땅을 사서 개발하고 멋진 서비스를 제공한 덕에 동네 땅값이 오른다면, 그런 탓에 임대료는 낮아지지 않고 가게를 10년 지킨 자영업자가 문을 닫게 된다면, 이때 공짜 점심을 즐기는 사람은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건물주입니다. 점심값은 크게는 국민의 세금으로 낸 것이고, 작게는 자영업자의 땀으로 낸 것입니다.
공짜 점심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다만 평등하지 않을 뿐입니다. 공짜 점심을 즐기는 이들은 임대료를 받는 건물주이며, 사상 최저 금리로 돈을 빌려 수십 채의 건물을 사대고 있는 부동산 투기자들이고,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보조금과 저금리 대출을 챙기고 있는 기업들이고, 평생 소득과 노후 연금을 보장받고 가족돌봄휴가와 재택근무를 활용하며 저리 대출까지 최대한 받아 자산을 늘리고 있는 정년보장 직장의 임직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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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상에는 이미 공짜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 그것도 영구적으로 공짜를 누릴 식권을 독차지하고 있는 소수가 있습니다. 부모에게서 그 식권을 물려받은 사람, 단 한번 시험을 잘 치러서 그 식권을 얻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평생 땀 흘리면서도 그 자격을 결코 인정받지 못하고 늘 점심값만 내는 다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수에게 ‘왜 공짜 점심을 원하느냐’고 손가락질하는 게 합당할까요? 오히려 ‘공짜 점심을 모두에게 나누자’는 이야기를 소수에게 전하고 설득하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요?
기본소득제는 모두에게 조건 없이 조금씩의 공짜 점심을 제공하자는 취지를 담은 제도입니다. 소수가 독점한 공짜 점심은 무한경쟁과 편법과 부정부패를 부르는 특권이 되지만,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모두가 마음 편히 먹고 일어나 일하러 나갈 수 있는 미래의 점심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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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짜 점심을 먹게 하는 것이 선한 모습이겠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벌어질 사회문제가 걱정되는 내용이다
[한철승의 매일춘추] 마음 백신 2020-11-02
원래 백신(Viccine)은 인체가 병이 걸렸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를 주입해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예방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낯선 공포를 이기는 몸과 마음이다. 마음에서 거부하면 약을 올바로 처방했는데도 약효가 나지 않는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s)‘가 발현될 수도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허락해도 육체가 허약하면 약을 처방할 수 조차 없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바이러스와 기약 없는 공생을 위한 기본은 심신의 건강이다. 날마다 웃음만 있는 삶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막연한 공포는 없었던 삶, 우리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일상의 모습이다.
이번 사태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마음 백신‘ 접종이 되었으면 한다.
[숫자 속에 가려진 죽음, 애도마저 사라졌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2020.10.31
우리 문화는 개인의 죽음을 공동체가 애도하는 문화였다. 전통적으로 장례는 마을 전체의 행사였고,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함께 아파했다. 함께 모여 곡을 하면서, 유가족들이 애써 슬픔을 감추지 않고 문상객과 함께 충분히 나누도록 배려했다. 이제는 단체로 곡을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장례식장에 함께 모여 며칠 동안을 머물며 유가족을 위로하는 일은 필수적인 절차다. 미국과 같이 장례식장에 모신 시신을 단 몇 시간 동안만 뷰잉(viewing)이란 행사를 통해 마주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문상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죽음은 달랐다. 어느 방송에서도 추모방송을 기획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죽음 뒤에 가려진 아픔마저 감추는 듯했다.
마치 오염된 짐짝 취급을 당하면서 바로 24시간 안에 화장을 끝내야 한다. 가족마저 감염되면 격리지침에 의해 화장장조차 따라 갈 수 없다.
도대체 코로나19 사망자 유가족들은 언제 울어야 하는가? 시신만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가족과 친지의 애도마저 사라졌다.우리도 코로나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국민적인 애도 의식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정규 칼럼] 무시로 갈무리하라 이정규 IT컬럼니스트 :2020/10/12
‘무시로’의 말뜻은 ‘시시때때로’ 혹은 ‘수시로’의 방언이라 하고, ‘갈무리’는 ‘저·장 정리하다’ 혹은 ‘잘 마무리하다’라는 표준말이다. 그러므로 두 단어를 합쳐서 ‘무시로 갈무리하라’는 말은 ‘그때 그때 일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이 된다. 인생에서 그때 그때 일을 잘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기업의 경우도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무시로 갈무리’하는 일은 모든 관리자들의 업무원칙이 될 것이다. 스타트업(start-up)의 경영기법에 그때 그때 일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OMTM(one metric that matters)’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 아티카의 강도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행인을 잡아 철제 침대에 뉘이고,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를 자르고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잡아 당겨 죽였다고 한다. 침대의 길이를 몰래 조절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영웅 테세우스에게 붙잡혀서 같은 방법으로 침대에서 죽기까지, 프로크루스테스는 이러한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신화는 획일화된 규율과 기준으로 인간에게 폐해를 주는 강제된 권력을 풍자하지만, 프로크루스테스는 침대의 길이를 남 모르게 조작할 수 있었으니, 외견상으로는 OMTM으로 포장된 MTM 침대라 할 수 있다
‘아포리아(aporia)’는 그리스어로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혹은 모순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맥락적 사고가 결여된 아포리안 매니지먼트(aporian management)가 이곳 저곳에서 득실댄다.
결론적으로 관리자가 과업을 ‘무시로 갈무리(수시로 잘 마무리)’하려 한다면, 각 시점에 걸 맞는 OMTM을 잘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로 그 관리자의 상사에 의하여 언젠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강제로 눕혀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니어 가수의 ‘무시로’와 ‘갈무리’ 노랫말에서도 한가지 경영의 지혜를 찾아본다.
[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하는가?]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2020/11/03
미국 UCLA의 심리학자 ‘알버트 메라비언’ 교수는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를 ‘word’, ‘tone of voice’, ‘body language’라고 이야기했다. "사람은 현란한 말솜씨보다 다정함에 끌린다"는 소위 메라비언의 법칙은 커뮤니케이션의 표면인 기술에 관해 이야기했을 뿐이다.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다면 위 세 가지 요소는 무용지물이 된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은 모두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과,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위계를 커뮤니케이션할 목적이 아니라면,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상기하자.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는 대상, 목적, 불완전성이다.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 온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커뮤니케이션에 위계를 탑재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진다.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이 온라인에 비해 더 완전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물에 불순물이 섞여 먹을 수 없다면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받아야 한다. 만약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에 위계라는 불순물이 더 많이 포함돼 있다면, 당분간은 목적 의식적으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서소문 포럼] "국민의힘이라면 일단 거른다" 중앙일보 2020.11.04
이런 심리를 이해하는 기제 중 하나가 당파성(혹은 정치적 부족주의)이다. 자신이 속한 또는 지지하는 정당이 승인한 세계관과 일치하는 않는 사실은 걸러버리고, 일치하는 사실은 과장해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정치적으로 쟁점화한 사안일수록 더욱 그리된다. 정당과 같은 입장의 얘기를 들으면 현명하고 논리적인 주장으로 여기고 그 입장을 수용한다. 그걸 의심하게 하는 주장에 대해선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말로 치부하거나 아주 냉담하게 조목조목 따진다. 이른바 편향 동화(biased assimilation)이자 확인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설득하고 싶어도 듣질 않으려 하니 설득되지도 않는다.
‘믿고 거른다’와 ‘무조건 믿는다’ 사이에 새 길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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