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심신오행

내 이름은 타이라 헤이스, 초급 과학 연구관이다. 아직 살아 있고,
아직 기록 중이다.
아마 이 기록을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할 일이 없고, 이 구명정에는 나 혼자뿐이다.
- P67

저의 데이터베이스에 귀하의 현재 상황과 범주가 일치하는 생존 시나리오는 저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아빠라면 이쯤에서 이렇게 말했겠지. 네 뱃심을 믿으렴.
- 배…… 뭐요? 귀하의 의식은 뇌 속에 존재합니다. 소화 기관이 있는 복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요.
- P69

내가 조언을 구하려고 찾아가면 아빠는 늘 내가 세상만사를 너무꼬치꼬치 따지고 내 본능에는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했어 - P69

실은 아빠랑 얘기를 나누기만 해도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되곤 했어. 그럴 때면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인지 저절로 명확해졌단 말이야 - P70

내가 어릴 적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부모가 아이를 재우려고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실은 진짜였던 걸까?
- P72

나의 아랫배에 있는 단전(丹田), 내 심신(心神)의 집인 그곳은 평온했다. 이 무모한 용기는 내 몸이 아직 조화를 이루지 못한 탓에 생겨났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왠지 목적이 있어서 나왔으리라는느낌이 들었다. 올바른 용기처럼 느껴졌다.
- P72

"페이젠, 우리는 선조의 지혜를 거의 다 잊어버렸다. 이 낭자가보기에 우리는 야만인이나 다름없을 것이야. 어쩌면 이 낭자가 우리를 크나큰 위험과 슬픔에 빠뜨릴지도 몰라."
- P74

나는 다만 무엇이 옳은 일인지만 알뿐이었다. - P74

아빠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10초 동안 받은 첫인상이 결국 그 사람의 평생 인상이 되는 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티의 말이 옳다. 나는 첫인상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나에게는 데이터가 더 필요하다.
- P77

타이라가 부적을 왜 그리도 끔찍이 아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자기 친구가 들어가 사는 집이기 때문이었다.
- P79

신령과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거늘, 그 신령이 내게 가르침을 달라고까지 하다니!  - P79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몰랐던 나는 낭자의 탕약에 들어간 갖가지 약재와 함께 그 재료들이 오행(五行)의 상생상극론(相生相克論)을 어떻게 구현하는지까지 상세히설명했다.
- P79

페이젠은 나에게 굉장히 너그러워서, 같은 말을 천천히 반복하곤한다.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곧 나에게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과제가 생긴다는 뜻인데, 그 덕분에 오히려 침착해져서 내가 문명 세계로부터 몇 광년이나 떨어진 이방인들의 세계에 있다는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 P80

페이겐과 대화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 둘의 세계와 배경 지식이 서로 너무나 동떨어졌고 아티의 통역에 의지하느라 상대의 말에 숨은 미묘한 의미를 다 전달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일이다.
- P80

아티, 페이젠은 네가 무슨 신령 같은 건 줄 알아. 내 생각에 여기사람들의 의식 속에선 합리적 지식이 채워야 할 부분을 미신이 대신 차지한 모양이야.
- P81

.… 예,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불은 단맛, 흙은 매운맛이지요.
제가 처음 하늘 조각배에서 모셔 왔을 때, 낭자의 단전은 묘하게도텅 비어 있었고 오행이 저마다 주도권을 잡으려 다투고 있었습니다. 낭자는 몸속에 불 기운이 너무 세서 편찮으셨던 겁니다. 불 기운이 쇠 기운을 눌렀고, 이 때문에 신체 계통의 여타 부분들이 조화를잃었습니다. 쇠 기운이 세를 회복하여 나무 기운을 줄이도록, 낭자께서는 쓴맛 나는 음식을 더 드셔야 합니다."
내 말을 들은 타이라 낭자는 표정이 굳었다.
- P84

"물론 사람은 다 제각각이라서, 올바른 치료법은 개개인의 본성에 맞추어 저마다 다르게 섞인 오행에 길을 트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낭자의 본성은 불의 기운을 띠고 있으니 어쩌면 지금 단것을 조금 먹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때로는 과한 불 기운을 불로다스리기도 하니까요."
- P84

세대가 바뀔 때마다 용감한 남녀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찾으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몸속에 섞여 있는 오행을 개개인의 고유한 본성에 맞추어 다스리는 기술을 연마했다. 오테이 촌장님조차도약초와 광물을 몸소 시험하다가 앓아누우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타이라 낭자의 조롱은 그들 모두를 욕보이는 짓이었다.
- P85

"우리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길, 어떤 언쟁도 함께 잔을 기울이는 즐거움을 막지는 못한댔어요.  - P85

낭자는 큰불이 바로 위 하늘의 공기를 덥히면서 주위의 덜 뜨게운 공기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새 불을 지피자 큰불의 힘이 새 불을 우리 쪽에서 끌어당겼고, 이로써 불을 마는 방화선(防火線)이 만들어졌다는 말이었다.
"낭자는 술법을 부리는 신선(神仙)이셨군요."
"그냥 간단한 물리학이에요. 불로써 불을 다스린다. 당신이 나한테 가르쳐 준 거잖아요?"
- P89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준 약이 타이라 낭자 몸속의 불에길을 터 주고 인도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낭자 또한 들불에 길을터 주고 인도했다는 것을.
- P89

진심으로 이곳에 정착할 생각입니까?
그...… 당장은 그게 제일 합리적인 행동 방침 아니야?
- 이해가 안 가네요. 제 데이터베이스의 모든 생존 모델에는 귀하가 가현대 과학으로부터 멀어질 경우 기대 수명이 심각하게 줄어든다고 나오는데요.

- P91

있잖아, 나는……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해. 사방이 다 원시적이긴하지만, 그래도, 공기 때문일까? 아니면 음식? 전보다 더 생생하게살아 있는 느낌이야.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나의 일부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 P91

이곳에선 원자나 쿼크, 초공간, 유전자 발현 조절 같은 것에 관한지식보다 단 것을 먹으면 몸의 불 기운이 강해진다는 지식이 더 쓸모가 있어,
- P91

때로는 비합리가 합리적이야. 주위의 모든 사람이 세상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면, 적어도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고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게 이롭단 말이야. - P91

나는 낭자의 부서진 배에서 흘러나온 빛이 보일까 하는 생각에미간이 찡그려지도록 유심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선 아무것도 안 보여요.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때 일어난폭발의 빛이 여기까지 닿으려면 5년은 걸릴 테니까."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타이라 낭자가 하는말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으니까. 때로는 그저 낭자의 목소리만 들어도, 낭자 곁에만 있어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 P92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페이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모르는 사람, 현실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상상으로 지어낸, 아니면 책에서 읽은 인물처럼.
- P95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 몸을 확인해 보았다. 양팔, 양다리, 손가락과 발가락, 모두 멀쩡했다. 그런데도 어딘가 사라진 부위가 있는 듯했다. 배 속이 훤하게 빈 느낌이었다.
- P95

나는 눈을 감았다. 친구 265명을 영원히 잃어버린 기억은,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 P95

그러다 아버지 생각을 떠올리자 그리움이 배에 꽂히는 주먹처럼사무쳤다.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무언가 느끼는 힘을 아직은 잃지 않았으므로,
- P96

나는 수정 공 너머로 타이라 낭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낭자의 눈이 차갑게, 텅 비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는 느낌, 껍데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낭자에게는불 기운이 없었다. 흙 기운도 없었다. 아예 아무것도 없었다. 낭자는빈 껍데기였다.
- P97

하늘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위험과 슬픔이었다.
- P98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몸 속의 오행이 사납게 들끓었다. 혼돈 속에서 서로 다투었다.
- P99

그 박테리아가 하는 일이 정확히 뭐였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인간으로 하여금 음식을 소화하고 질병에 맞서싸우고, 심지어 기분과 성격마저 변화시키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뭐? 어떻게?
- 혈류 속에 화학 물질을 분비하여 신경 전달 물질을 억제하거나 활성화하고,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고, 신경계의 화학적 균형을 수정하는 방식으로요.
- P101

귀하의 아버지가 옳았던 것 같습니다. 이 행성에서 귀하는 문자 그대로 배로 생각했습니다. 페이젠네 부족은 단순히 자기네 배 속의 생물군과 공존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식을 이용하여 그 생물군을 조종하는 방법마저 발견했고, 이로써 자신들의 기분을 조절했습니다.
- P101

내 안에 사는 생물들이 나 대신 생각을 했단 말이지, 사랑에 빠진건 나였을까, 아니면 박테리아들이었을까?
- P101

 "인간의 의식은 하나의 물리 현상으로서 이 세계에존재하며, 이 세계의 질서를 따른다. 우리 배 속의 박테리아는 우리 사고의 총합을 생성하는 체계 속의 또 다른 구성 요소이다. 우리는 이미 몇 조개나 되는 세포들의 공동체이다. 거기에 몇 조 개를 더하여 생각하지 못할까닭이 있을까?"
- P101

오테이 촌장님과 나는 타이라 낭자의 몸이 조화를 되찾도록 사흘에 걸쳐 쇠 기운과 나무 기운, 물 기운, 불 기운, 흙 기운이 든 약재를 세심하게 계량하여 투여했다. 오행의 기운이 낭자의 몸속에 터를 잡고 세를 불릴 때까지, 그리하여 낭자가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우주가 될 때까지.
- P102

프로바이오틱 식이요법 - P102

당센네 선조를 따라 이 신세계로 온 장내 박테리아 군집을 통제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요법이죠. 먹는 음식을 바꿔서 건강을 유지하고 기분을 조절할 수 있는 거예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끝에 얻은 지혜입니다."
- P103

"그 요법이 왜 통하는지 설명하느라 당신이 동원한 오행인가 하는 원리는 잘 이해가 안 가요. 어쩌면 그냥 비유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어요. 그러니까 잘 보존해서 나머지 인류에게도 가르쳐 줘야 해요. 유서 깊은 공생 생물들과 더불어 사는 법, 또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한테요."
- P103

"이 미생물들이 몸속에 살고 있으면 나는 다른 사람이 돼요. 더용감하고, 더 거침없고, 더 행복하거든요."
"지금의 낭자가 진짜입니다. 이게 낭자의 본래 모습이에요."

- P104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아직은, 내 의식이 나 자신의 세포들뿐 아니라 내 몸에 사는 미세 유기체 수조 개의 세포에도 구현된다는 사상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우리도 그 유기체들하고 같은 방식으로 이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죠. 나의 유기체들이지만, 그것들이 곧 나라고 할 수는 없어요. - P104

제가 실행한 시뮬레이션에서는 시드사가 귀하의 유익한 해법을 알아보고 거래에 응할 확률이 52.26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꽤 큰 위험을 감수하는 셈인데요.
"이럴 땐 내 뱃심을 ….… 아니, 배 속의 힘을 믿는다고나 할까."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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