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은 특허 전문 변호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보디워크스의 사업 분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죽은 이의 육신을 예술적인 추모비로 바꾸는 것, 다른 하나는 젊음의 샘이었다. 어느 쪽의 잠재력이 더큰지는 자명했다.
- P41

다음 또 그다음, 가시 돋친 질문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으리으리한 선물을 받아 놓고선 포장지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이지.
- P42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사랑을 만끽했다. 나를 해방시키고, 죄책감을 안기지 않고, 나를 짓누르는 일 없이 끌어올리는 사랑을 당연히 행복해야 마땅했지만 내가 느낀 것은 무력감과 정체감,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어디로도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 P44

배울 것은 너무나 많았고, 나의 끝나지 않는 학생 생활은 언제나시작을 눈앞에 둘 뿐 실제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이 아닐까? 나는 잠재력과 가능성과 첫걸음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다. 악기를 배워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연습할 시간이100년이라면 거장이 될 법도 했으니까.
- P44

나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제야 비로소 남편의 말에 깃든 진실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실은 오래전에 눈치채 놓고서 억지로 무시한진실이었다. 눈가와 입가의 주름, 감추려고 염색을 해서 뿌리 쪽만 하얗게센 머리, 느려지고 뻣뻣해지고 조심스러워진 몸동작 같은 것들. 남편은 내나이를 이미 한참 전에 따라잡고 그대로 계속 나이를 먹은 반면, 나는 우리 둘 다 시간의 파괴력 앞에 끄떡없는 척했다. 두려워서, 끝끝내 진실을부정하려 발버둥을 쳤다.
- P46

분노도 증오도 내 안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기자의 질문은 내 남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진 것이기도 했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이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의 전조가 아니기를 바라며.
- P48

작품의 양손을 완성하는 데에만 꼬박 1년이 걸렸다. 작업실에 그저 멍하니 앉아 내 손으로 남편의 손에 깍지를 낀 채 며칠을 보내곤했다. 그와 함께 낭비했던 나의 시간을 돌아보며, 결코 이루어지지않을 함께하는 삶을 상상하며, 영영 태어나지 못할 우리 아이들을그리며,
- P48

일흔한 살이던 그해에 나는 임신한 몸이었고, 그래서 조금이나마 평온을 누리고 싶었다.
존이 죽기 전에 냉동 보관을 해 놓은 정자가 있었다. 이제야, 첫아이를 낳고 반세기가 더 지나고서야, 나는 마침내 준비가 되었던것이다.

- P49

하지만 내 외모는 아직도 서른 살로 보였기에 이 남자는, 구김살없고 혈색 좋은 얼굴에 붉은 턱수염이 수북하게 자란, 미소가 천연덕스럽고 목소리가 걸걸한 이 남자는, 내 곁에 앉고 싶어 했다. 남자는 쉰 중반쯤으로 보였고 십중팔구 본래 나이일 터였다. 보디워크스의 시술을 감당할 만큼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 싶었다. - P49

"당신은 플라스티네이션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그게 왜 중요한지,
의학 연구와 교육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지 얘기해 줬어요. 나는 집에서 본 사진 덕분에 당신이 누군지 금세 알아차렸고요.
당신은 정말로 열의가 넘치더군요. 우리한테 살갗이 다 벗겨진손 한 쌍을 보여 주면서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해 줬어요. 그손의 근육과 뼈와 신경이 다 공학 기술의 경이로운 업적이라면서.
난 그걸 보고 당신이 스스로 만든 작품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도."
- P51

그 무렵의 내가 행복하게 지냈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행복을 잃고 나서 뒤늦게 행복했던 것을 알아차리는 경우는 자주 있게 마련이다.
- P51

"네 인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어. 너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사람처럼 행세하기 싫어서."
내가 말했다. 뒤이은 아들의 목소리에서는 앞서와 달리 이글거리는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끼어들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난 내내 기다렸는데."
- P52

미안 나는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도 있으니까.
- P53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당신이 돌아올 거라고 철석같이믿었어요."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났다. 나의 시간이 멈춰 있는 동안 너무나많은 이들이 세상을 떴다. 그런데도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 P53

"몇 년 후에는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내가 얼마나 멍청한놈이었는지 그제야 알겠더군요. 당신은 나에게 삶을 줬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사랑은 중력 같은게 아니에요. 그냥 늘 존재하는 거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그러니까 나는 계속 그렇게 기다릴 게 아니라, 마땅히 내 손으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거죠."
- P53

이제는 그 사람을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더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아. 
그 사람한테는 내가 필요하니까. 
나한테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보다 더.
- P54

다시 보니 그 말이 옳았다. 마법처럼 신비한 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속에 온기를 느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가녀린 물줄기 같은 사랑이.
- P54

내가 겁먹은 열여섯 살 아이였을 때에는 내 안에서 찾아 불러내지 못했던 것이, 일흔두 살이 되고 보니 자연스레 나를 찾아왔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삶을 견디는 능력이었다.  - P54

그 아이는 우리가 죽음을 정복한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또한 이제껏 존재했던 거의 모든 인간이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 그 아이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제 우리 인간들은 영원히 아는 사이로 지낼지도 모른다.
- P55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때, 내 아들은 어머니가 필요한 시기를 이미 한참 전에 지나 버린 어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더 순수하면서도 덜 확실하다고 느꼈다. 볕에 바래오 쉬이 바스러지는.모래톱의 동물 뼈처럼 - P56

나는 허리를 숙여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들한테서는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만족감의 냄새가 났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건 우리가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지우려고 만든 미신이에요."
언젠가 존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존은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했다. 그럴 만큼 오래 살지 못했으니까.
내 아들은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지 않았고, 나의 삶은 그렇게또 한 번 끝을 맞았다.
- P57

그중 어떤 것도 나를 바꾸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상실감에,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에 지쳐 갈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속으로 너무 늙어 버렸는지도 몰랐다. 늙지 않게 해 주는 시술을 그렇게 많이 받아 놓고도.
- P58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 낸 가장 멋진 거예요. 나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두려운 일에 도전해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숨이 거칠어지게 하는 일들 말이에요. 그날 당신한테 다가갔던 것도 내가 언젠가는 늙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겼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 P59

나는 존과 함께 보냈던 길고 긴 나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 기억에 남은 날들은 너무도 적었다. 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 P59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 P59

그러다 나의 차례가 오면 죽음을 맞기로 했다.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이루지 못한 채로,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한 채로,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배우지 못한채로, 그러나 한 여자의 삶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 채로, 내인생은 하나의 기다란 호(弧)가 될 터였다. 시작과 끝이 있는
- P60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 인생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데이비드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당신은 자유로워야 해요.
- P60

"나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거야." 나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지 않아. 서로를 위해 곁에 있기를 원하는 거지."
- P60

캐시는 내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우리는 함께 포치에 앉아 쿠키와 레모네이드를 나누어 먹었다. 여름이었고, 뇌우가 한바탕 쏟아진 직후였다. 세상이 낡았으면서도 한편으로 새로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죽음 없는 삶이 변하지 않는 삶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도 있고, 사랑에서 벗어날 때도 있어요. 연애든 결혼이든, 우정과 우연한 만남이든, 모든 관계에는 포물선이 있어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살아가는 시간과 죽음이 있는 거죠. 엄마가찾는 게 상실이라면 그게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 P61

그러나 딸은 나와 다른 세상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 못했듯이, 나는 영원한 시간을 감당하며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운명이었다.
내가 늙어 가다가 죽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시작해야 하는 운명으로부터.
- P61

"나는 여러 번의 삶을 살면서 이미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어. 어떤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법이란다."

"그럼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여성이자 영원히 살 기회를 얻은 최초의 여성이 그 기회를 포기한 최초의 여성이 되겠군요." 캐시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난 엄마가 죽는 거 싫어요. 죽음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미신이에요."
- P61

믿음의 문제란 모름지기 그 끝에 이르면 합리에 기반한 주장으로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게 마련이고, 거기서는 도약을 하는 수밖에 없다 - P62

기록물이 될 것이다. 실존의 적나라한 진실에 덧씌워진 환상을 오랫동안 천천히 벗겨 가는 과정을, 그것은 낭만적이지 않다. 보기에흐뭇하지도 않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자주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이고, 그것이 진실이다.
- P62

언젠가 내 아이들의 아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못 할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식의 존재 양식, 이토록 짧고 폐쇄적인, 출생과 사망으로괄호가 쳐진 삶이라는 것을, 그때는 아마도 나의 연대기가 이해의틈을 메워 줄 것이다. 예술 작품이 다 그렇듯이 - P62

1. 호 (10:00-10:40) 독서나눔

시간 많다는 생각에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하기

우리의 삶은

삶 ( ) 죽음
으로 마무리 된 예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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